내가 요리를 하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이름난 장소에 가면 물 한 잔 마실 곳을 먼저 찾게 된다. 절에 가면 차 한 잔 할 곳이 있나 살펴보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멈추면 원두커피 뽑는 코너가 있는지 살핀다. 달리 말하면 염불보다는 제삿밥에 더 마음이 있는 때가 많다. 이런 내가 까무러치게 행복해지는 곳은 이름난 미술관 들이다.
그곳은 부암동의 공기가 섞인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환기미술관일 수도 있고, 그곳은 아이스티와 샌드위치가 맛있는 삼청동의 국제갤러리일 수도 있다. 최근 다녀 온 그곳은 미국 뉴욕의 모던 아트 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이었는데, 미술관을 꽉 채운 예술 작품만큼 ‘아트’한 미술관 내(內) 식당 메뉴들은 나를 놀라게 했다.
♡ 그림 같은 초콜릿 케이크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 모던 아트 미술관은 19세기 후반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현대 미술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최근에 새 단장을 하여 더욱 넓고 쾌적해진 미술관에 들어서면 세계 각국에서 온 관람객들이 로비에 가득한데, 건물의 내부 구조를 이루는 높직높직한 벽과 어울려 그 자체로 이미 한 장의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띵땅 거리는 피아노 음률이 흥겹게 울리며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에스컬레이터가 멈춘 2층의 복도에 있는 설치 작품에서 퍼져 나오는 소리다.
고 백남준 선생의 아트다. 관람객이 주변을 빙 두를 정도로 유난히 붐비는 작품이다. 3층에 전시된 사진 작품을 감상하고, 4층과 5층의 말로 다 표현 못 할 그림들(칸딘스키, 프리다, 이름이 낯선 초현대 작가들의 것들)을 한참 둘러보고 5층의 카페로 가 보았다.
좁은 테이블을 다닥다닥 붙인 테라스에 2인석이 운 좋게 나서 냉큼 앉았는데, 주문을 하려고 메뉴를 보니 예사의 카페가 아니었다. 범상치 않은 이름이 붙은 칵테일 리스트 하며 묵직한 청동 주전자에 준비되는 차 메뉴 외에도 프렌치와 아메리칸 식재료를 적절히 섞은 요리들이 입맛을 당겼다.
밥 때가 아니었기에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과 차만 주문을 했다. 납작한 직사각형의 접시에 담겨 나온 케이크. 바닥에 까는 타일을 닮은 모던한 접시에 초콜릿 소스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딱 한 조각의 까만 케이크가 그림같이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모던 미술관의 케이크는 모던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지는 접시마다 어찌나 푸드 스타일링이 훌륭했던지 테라스에 앉은 손님들은 자기 것을 먹는 것보다 이웃 테이블이 주문한 요리들을 훔쳐보느라 모두들 분주했다.
♡ 인상적인 티타임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은 아마도 모나리자가 있는 ‘루브르’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오르세이 미술관(Musee d'Orsay)'이 나는 더 재미있다. 20세기 초 까지만 해도 기차역이었던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미술관이라서 그렇다. 개조를 너무나 잘해서 건물의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였기 때문에, 미술관에 들어서면 금방 1930년대로 날아간 느낌이 들 정도다.
오르세이 미술관에도 각 층의 구석마다 카페며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맨 꼭대기 카페다. 건물이 기차역이었던 시절부터 꼭대기에 박혀 있는 커다란 시계를 통해 햇살이 들어오는 카페. 이곳에 앉은 많은 이들은 차 한 잔을 시켜 두고 각자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미술관 내에서 가장 전통적인 프랑스식으로 꾸며진 티 룸에서는 코스 요리로 점심을 먹을 수도 있지만, 오후마다 있는 티타임이 더 우아하다.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잔뜩 보고 난 후라면 그림 속 등장하는 티타임과 흡사한 세팅이며 분위기에 놀랄 것이다.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차 주전자에서 따끈한 차를 따르고, 도톰하게 구워진 쿠키를 곁들여 먹다 보면 마네의 그림 속에서 연한 핑크 가운을 입은 여인네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은 3-D 컴퓨터 게임보다 훨씬 리얼하고 인상적이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아트’한 먹을 거리의 기억은 비단 미술관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뮤지컬 ‘시카고’를 보다가 인터미션(공연 중간에 갖는 쉬는 시간)에 마신 간이 바의 ‘진 토닉’은 내가 여 주인공 이라도 된 것 같은 흥분을 부추겼다. 한 겨울의 국립극장에서 ‘노틀담의 꼽추’를 보던 인터미션에 마신 홍차 한 잔은 극에 몰두하면서 굳어졌던 몸을 풀어줬었다.
그림보다 케이크를 오래 기억하고, 뮤지컬 주제가보다 진 토닉을 추억하는 나는야 예술입문자. 나와 같은 초보자들을 ‘아트’의 세계로 유혹하고 싶다면 ‘아트’한 먹을 거리를 미술관에, 음악당에, 공연장에 더 많이 준비해 주세요.
EBS 요리쿡 사이쿡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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