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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버지' 미국과 공미(恐美)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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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버지' 미국과 공미(恐美)주의

입력
2006.09.20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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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전통제권과 한미FTA를 둘러싼 논란이 식지를 않고 있다. 이 논란은 우리 사회 내 보수 대 진보 사이 익숙한 균열구조에서 보자면 아주 기묘하고, 새로운 양상이다. 진보진영은 한미FTA 반대ㆍ전작권 환수 찬성을, 반면 보수진영은 한미FTA 찬성ㆍ전작권 환수 반대를 말한다.

정권의 입장은 어떤가. 진보진영과는 한미FTA로, 또 보수진영과는 전작권으로 각각 각을 세운다. 아마 소망스럽기로 치자면 전작권을 통해 진보진영을, 한미FTA를 통해서는 보수진영을 통합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한미FTA를 통해서는 진보진영이, 전작권을 통해서는 보수진영이 이반하는, 그래서 정치적 셈법으로 치자면 최악의 선택이 된 셈이다.

● 전작권ㆍFTA 둘러싼 기묘한 균열

권력의 구심이 공고하다면야 2개의 쟁점을 통해 권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겠지만, 오히려 2개의 원심력에 의해 권력 자체가 해체의 위기, 공중분해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으니, 집토끼 산토끼 다 놓치고 먼 산 바라보는 형국이 아닌가.

그런데 2개의 원심력이 충돌하는 그 깊은 배경에는 결국 미국이 있다. 미국은 결코 국제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곧바로 국내정치라는 데 한국정치의 특이성이 있다. 국내정치에서 미국의 힘의 원천은 궁극적으로 공포에서 나온다. 나는 그것을 공미주의라고 부른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인자하고 힘센 아버지의 형상으로 또 정의의 표징으로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어 왔다. '아버지' 미국으로 말이다. 미 네오콘이 현 정부를 '집나간 탕아'라 칭했던 것도 따지자면 이런 우리 모습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우상 파괴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전작권과 FTA문제를 놓고 볼 때 공미주의 그것은 2가지 형태로 현상한다. 버려짐에 대한 공포, 즉 혹시 미국이 우리를 떠나면, 우리를 버리면 어찌되나가 첫번째다.

어떤 이는 전작권을 경제적 실리 즉 전작권 환수 이후의 군사비 부담을 말하면서 그 환수에 반대한다고도 하지만, 그 정치심리의 저변에 도도히 자리잡은 공포를 부인하기에는 부족하다. 두번째는 한미FTA에 관계한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한미FTA가 우리 경제에 실익이 되지 않을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한미FTA에 동의를 표한다.

만일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받게 될 불이익을 들면서, 모순된 선택에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 심층에도 실은 처벌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대중심리 현상은 이라크 파병 때도 작동했다. 그때도 미국의 파병 요구가 부당함에도 들어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곤 했다.

이렇게 아버지는 말 안 들으면 언제든 우리를 버릴 수 있고, 또 벌할 수 있다. 전작권은 '아버지' 미국이 우리를 버릴 수 있다는 징후로 읽히고, 한미FTA는 반대로 처벌이 뒤따를 수 있다고 보는 무의식은 여전히 우리의 한미관계가 건강한 어른의 그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친미건 반미건 모두 미국이 저 앞에 놓인 대상으로 보일 때, 다시 말해 또렷한 대상화가 가능할 때 진정한 정치적 의미로 다가 선다. 그러나 '아버지' 미국은 여전히 우리 의식의 표층을 뚫고 무의식 한 켠을 점하고 있는 그런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 관한 한 우리의 국가는 유아기를 못 벗어난다.

하물며 정신적으로야 말할 나위 없다. 이유(離乳)의 고통이 따라야 소년기가 오는 법이고, 나와 너를 가릴 수 있어야 청년이 되는 것처럼, 무의식에 자리 잡은 '아버지' 미국을 극복해 내어야 비로소 성인(成人)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한에 있어 미국은 여전히 우리 내면의 문제이자 정신적 성장의 문제이다.

● 한국 정치심리 저변의 미국 공포

우리의 한미관계는 '관계망상'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자기보존을 최고의 지상명제로 하는 것이 근대의 국가세계이다. 우리나 미국이나 그것이 국가인 이상 이 법칙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한사코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 과연 언제까지.

이해영ㆍ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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