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준만 칼럼] 기회주의 공화국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준만 칼럼] 기회주의 공화국

입력
2006.09.20 00:01
0 0

기회주의를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기회주의자'란 딱지는 모욕적인 욕으로 통용되고 있다. 기회주의가 무엇이길래 그러나?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기회주의는 어떤 일에 있어서 종국의 목표를 위해 철저하지 못하고, 정세에 따라서 기회를 관망하고 지조 없이 편의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으로, 이론의 결핍과 행동의 돌변이 그 특징이다.

얼른 보면 욕 먹을 만하다. 그러나 욕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정녕 기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은 기회주의자 아닌 사람이 매우 드문 사회다.

역사적 굴곡이 심한데다 사회 변화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굴곡이 없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느려 모든 게 차분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선 기회주의자 노릇을 하고 싶어도 할 만한 계기가 나타나질 않는다. 기회주의는 급격한 변화와 역동성의 산물이다.

● 한국민주주의는 '욱' 민주주의

기회주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법칙이 작용하는 개념이다. 반대편에 있다가 내 편으로 오면 '투철한 성찰'이 되지만 내 편에 있다가 반대편으로 가면 '더러운 변절'이 된다. '이론의 결핍'이라는 것도 가치관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에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판정을 내리기 어렵다.

기존 이론을 뒤엎을 수 있는 화려한 명분을 새로 만들어내는 건 매우 쉽다. 누구에겐 '추악한 기만'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이라도 또다른 누구에겐 '시대정신에 투철한 결단'으로 인식될 수 있다.

기회주의의 본질은 유연성이다. 그 유연성이 인간관계에선 파렴치 행위로 욕 먹을 수 있지만, 기술ㆍ경제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데 있어선 매우 소중한 덕목이다.

기회주의를 후자의 유연성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쓴다면, 한국은 '기회주의 공화국'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탁월한 면모를 보여왔다. 그 실속에 대해선 말이 많지만 변화속도가 가장 빠른 정보기술산업에서 한국이 선진국이 된 건 바로 그런 유연성 덕분이다.

여기서 문제는 기술ㆍ경제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성과 이념ㆍ정치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성이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겉으론 구분되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같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새로운 걸 좋아하는 한국인 특유의 '새것 선호 신드롬'은 비단 소비문화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유권자들만큼 정치권 물갈이를 대폭적으로 자주 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흥미로운 건 그런 행위는 대부분 감성의 폭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론? 그런 건 없다. '욱' 하는 기질이 훨씬 더 중요한 변수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욱 민주주의'라 말해도 무방하다.

'욱 민주주의'가 기회주의자를 양산하는 건 필연이다. '욱'이라는 바람을 타고 출세한 사람들에게 이렇다 할 이론이 있을 리 없다. 물론 나름대로의 이론이야 내세우겠지만, 그걸 검증해보기도 전에 그들은 곧 새로운 바람에 의해 밀려나거나 다시 그 바람에 자신을 맞춘다. 이렇게 본다면, 기회주의는 '욱 민주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 대세 추종이 곧 진리인 사회

기회주의의 최대 장점은 안전보장과 도약이 가능하다는 데 있지만, 그 사회적 비용은 '집단적 관망'이다. 언제 어떻게 무슨 바람이 불건 대세를 추종하는 게 진리요 정의다.

대세를 무시하고 양심과 소신을 갖고 나서봐야 손해보거나 바보 된다. 물론 대세에 저항하는 희소성으로 인기를 얻어 새로운 대세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건 기만을 수반한 기회주의 프로젝트로 추진할 때에만 가능하거니와 또 그런 성격 때문에 수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기회주의는 한국의 무한한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제도ㆍ조직ㆍ개인도 사회적 존경과 신뢰는 누리기 어렵게 돼 있다. 이걸 깨닫는 게 우리 모두의 자긍심과 정신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