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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인문학 자성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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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인문학 자성과 분노

입력
2006.09.20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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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죽어 간다.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고 위기의식마저 마비된 상태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공자가 해마다 줄고, 각 대학의 인문ㆍ문과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통폐합 또는 폐지 대상 1순위가 됐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인문학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올해를 ‘인문학 부흥의 해’로 정하고 ‘새로운 국가 발전 전략으로서의 인문학’을 위한 갖가지 실천 방안을 내놓고 있다.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선언에 이어 각 대학 인문대 교수들의 연대 서명도 예정돼 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은 크지 않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을 통해 위기의 원인을 짚어보았다.

■ 변화에 둔감한 눈높이

서울 모 대학의 철학과 조교 황모씨는 얼마 전 지도교수의 신문 기고문을 약간 손질했다 심하게 혼이 났다. 기고문에 실린 한문투의 표현을 쉬운 우리 말로 바꿔 썼다가 “왜 글의 웅혼함이 떨어지게 만들었느냐”는 질책을 받았다. 황씨는 “다른 분야에서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학문적 시도가 많지만, 순수 인문학 분야는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도 “학문적 깊이만 있으면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중과의 소통이 학자에게도 필수인 시대”라며 “학문적 업적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원식 인천문화재단 이사장(인하대 국문학)은 변화에 무딘 인문학 교수 사회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았다. 그는 “이공계는 산업현장의 수요에 따라 커리큘럼을 짜는 등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했지만 인문학계는 교수의 협소한 전공지식이 수십 년 째 반복ㆍ전수되고 있다”며 “취업뿐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는 교양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인문학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시장 만능주의 극복이 과제

구체적 ‘성과’보다는 추상적 ‘계획’에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올 초 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한 ‘인문학위기 포럼’에 참석한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철학)는 “인문학 위기는 김대중 정부 초기 ‘연구결과’가 아닌 ‘연구계획’으로 지원여부를 결정하면서부터 더욱 불거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구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연구계획서를 쓰느라 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연구라는 본업에 오히려 소홀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미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장(사학)도 “정부의 인문학 연구지원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논문 발표수 등 인문학 연구방법과 어울리지 않는 계량법으로 학문성과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정부의 잘못된 정책방향이 인문학의 깊이 있는 성찰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공자들이 한결같이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역시 ‘시장 만능주의’라는 현실이다. 경제적 부가가치 생산에 이익이 되는 것만 대접받는 현실이 이미 대학을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학문의 전당까지 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심지어 국제화라는 미명아래 한국학 관련 학문까지 영어로 강의하도록 강요하는 게 바로 한국 인문학계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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