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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의 미디어 비평] 역사物 속에서 빛나는 '포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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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의 미디어 비평] 역사物 속에서 빛나는 '포도밭…'

입력
2006.09.1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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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텔레비전 드라마는 '역사'를 담아내느라 바쁘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역사 왜곡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즈음, 정작 이 문제에 대해 날을 세워야 할 우리 정치권과 학계의 대응은 신속하거나 치밀하지도 못할 뿐더러 미온적이다.

반면에 이와 대조적으로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거침없이 시도하는 하나의 뚜렷하고도 강력한 흐름이 형성되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 민감한 외교 문제이자 국가 정체성 문제에 적극 대응하기로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지상파 방송 3사가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 드라마를 각각 방영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MBC의 '주몽', SBS의 '연개소문',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KBS의 '대조영'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내년에도 역시 고구려 광개토왕의 일대기를 다룬 '태왕사신기'의 방영이 예정돼 있다.

이 역사 드라마들은 주제 의식을 그려내는 전체적인 톤에서 다소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한결같이 한민족과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하겠다든지,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켜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겠다든지 하는 '계몽적''자국중심주의적' 제작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 결과, 드라마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역사 의식의 과잉, 소재의 과잉, 전쟁이나 전투 신에 집착하는 장르적 관습의 과잉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특정 장르에 드라마가 편중되는 현상에 식상해 눈을 돌려보면, 의외로 신선한 소재와 좋은 내용의 양질의 드라마(quality drama), 소수자 드라마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 시대극의 열풍 속에서 '네 멋대로 해라'라는 양질의 소수자 드라마가 홀연 나타나, 결국 그 팬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 폐인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장금'에 대한 전국민적 열광과 찬미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전통과 현대의 교감을 추구하던 '낭랑 18세'라는 드라마가 갖는 미덕이 기억되어야 하듯이.

지금 역사 드라마의 과잉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양질의 소수자 드라마로는 '오버 더 레인보우'와 '포도밭 그 사나이'를 꼽을 수 있다. 특히 '포도밭 그 사나이'는 여러 면에서 유의미한데, 우선 이 드라마는 위의 역사 드라마들과는 달리 거대 서사가 아니라 좀 더 우리 사회 내부로, 그리고 인간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볼 것을 권유한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에는 현재 한국 사회의 다양한 풍경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즉 한국사회의 새로운 인종적 풍경을 포함한 농촌의 풍경,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들이 엮어내는 연애의 풍경 등 매우 낯선 풍경과 낯익은 풍경이 혼재해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아마도 역사나 전쟁이 아닌 '농촌'을, 젊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현대적 감수성을 지닌 드라마 형식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아닐지. '전원일기'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이후,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농촌이 이렇게 부각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일에 찌든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국제결혼가정의 여성만 남아 있는 농촌의 남루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면서도, 포도밭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농촌'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일과 사랑에 대한 묘사가 현실감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여,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따뜻한 공동체와 그 문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그렇게 된 데에는 윤은혜, 오만석이라는 두 주연배우의 공도 있지만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를 포함한 레게 음악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는 듯한 레게 음악의 리듬이 갖는 진정성이 이 드라마에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톤을 부여했다.

물론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도 나름의 전형성과 상투성은 찾아볼 수 있다. '도시처녀' 대 '시골총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끝까지 유지되고, 두 주인공의 순수함과 순박함은 사투리와 몸빼 바지, 그리고 그을린 피부라는 기호로 표상되며, 이 두 사람은 섬세하고, 세련되고, 부드러운 의사 경민과 지적인 전문직 여성 수진과 시종일관 비교된다.

하지만 근래에 이 드라마만큼 젊은 20대 여성을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도 없다. 그것은 도시가 아닌 농촌을 부각시킨 드라마라는 점 못지않게 중요한,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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