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길택(1952~97) 시인이 있었다. 교사로 탄광ㆍ산골 마을을 돌며 초등학생을 가르쳤고, 1997년 폐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탄광마을 아이들’ ‘할아버지 요강’ 등 시집과 ‘느릅골 아이들’ 등 동화집을 냈다.
그가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게 된 것은 80년 4월 ‘사북사태’이후부터다. 어떤 글에서 그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아이들은 몰랐고, 나 또한 그런 까닭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너무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고 썼다.
글을 쓰고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며 서로를,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던 그는 훗날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형편없는 글씨로 아이들은 날마다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를 ‘가르친’ 아이들의 시가 두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강원 정선군 탄광촌 사북초등학교 아이들의 문집에서 가려 뽑은 시 모음집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와 산골 마을인 정선 봉정분교 아이들의 시 ‘꼴찌도 상이 많아야 한다’(보리 발행)다.
책에 실린 아이들의 시는, 그 어떤 잘 쓰여진 시집이나 산문집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슬픔과 체념, 어린 고난과 가난한 기쁨이 아프도록 뭉클하다. 어른들과 어른들의 세상을 향한 소박한 항변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죈다. 진솔한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아버지는 광산을 팔 년이나 다녔다./ 그러나 아직도/ 세 들어 산다./ 월급만 나오면 싸움이 벌어진다./ 화투를 쳐서 빚도 지고 온다./ 빚을 지고 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죽으라고 빈다./ 그래도 어머니는 용서 안 한다./ 밤에 잘 때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오손도손 잔다./ 그 땐/ 누나와 나도 꼭 껴안고 잔다.”(‘아버지’ 5학년 김명희)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약이 올랐다./ 나는 거기 있는/ 아이들을 보고서/ 텔레비를 껐다./ 이제는 약이 덜 오르는 것 같았다.”(‘어린이날’ 5학년 배연표)
아이들의 시는 마을 풍경, 어른들과 아이들 자신의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탄광마을 아이들의 시는 어른들이 기록하지 못한 탄광 마을의 ‘정직한 역사’이고, 산골마을 아이들의 시는 모내기하고 고추밭 매는 세상 삶의 구비들에 대한 꾸밈 없는 증언이다.
임길택 선생은 ‘꼴찌도…’의 머리말(84~85년 학급문집에 썼던 글) 서문에 운동장 가 화단에 가꾼 봉숭아며 채송화 등의 화려한 꽃과 벼꽃 같고, 콩꽃 감자꽃 같은 아이들을 견주고 싶지 않다고 썼다. “언제 피었다 지는지도 모르는 그 꽃들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음을 볼 때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광부로서/ 탄을 캐신다. 나도 공부를/ 못하니 광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아버지는) 너는 커서 농부나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고 하신다.”고 썼던 6학년 우홍이는, 지금 무슨 일을 하면서 그 시절 아버지 말씀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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