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들이 유엔 헌장을 만들 때 사무총장에 대한 개념과 규정은 극히 모호한 상태였다. 자격 요건이나 임기, 선임절차는 물론 역할에 대해서도 구체적 구상이 없었다.
헌장 제정을 한창 논의할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moderator)'쯤 될 것이라고 묘사한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헌장은 사무총장을 '최고 행정 책임자(Chief Administrative Officer)'라고 표현했으며, 독자적 임무에 대한 조항도 제99조가 유일하다.
■ 이 조항에 따라 사무총장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한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안건을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 주의를 환기하는 일로 돼 있다.
이를 반영하듯 초기 미국이 생각하던 사무총장은 '특출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되 '국제적 지위를 보유한, 중소국가 출신'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전부였다.
전승 5개국이 움직여 갈 유엔이니 사무총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는 실질 관심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권 행사를 몇 차례 거친 끝에 1946년 2월 탄생한 초대 사무총장은 전시 노르웨이 망명정부의 외무장관 트리코프 리였다. 그러나 그의 재임 7년은 소련과의 마찰로 순탄하지 못했고, 결국 그로 인해 사임했다.
■ 오늘날 괄목할 사무총장의 정치적 지위와 권한, 국제적 역할의 확대는 2대 총장 더그 함마슐드 재임 8년의 업적이 그 초석이다.
국제적 무명, 45세의 젊은 스웨덴 외무장관. 정작 자신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지명 과정도 모른 채 직을 맡았지만 그는 유엔 사무총장사(史)의 이정표를 바꾼 인물이다. 취임 이듬 해인 1954년 중국에 추락한 미국 B-29폭격기 승무원과 조종사 17명의 송환교섭을 성사시킨 업적은 그 결정적 계기였다.
■ 중국이 이들을 스파이 혐의로 재판에 회부한 냉전시대 위기에서 함마슐드는 베이징을 직접 방문하는, 당시로서는 '창의적'인 리더십으로 1년 만에 전원을 구출했다. 그의 외교력은 동서 양 진영이 모두 인정하고 환영했다.
1955년 7월 교섭상대였던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의 전보에서 남은 승무원 13명을 모두 송환한다는 통보와 함께 때마침 자신의 생일 축하메시지까지 받은 것이 이를 말하는 일화이다.
그는 높은 인품과 덕망, 국제적 혜안을 가졌었다. 차기 사무총장의 요건으로도 이는 가장 중요하게 꼽힌다. 반기문 외교장관의 총장 진출을 결정지을 안보리 3차 투표가 28일 실시된다니 관삼이 크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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