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이하 현) 먼저 축하드립니다. 며칠 뒤면 외손자인 아베 의원이 수상이 될 거라면서요.
기시 노부스케(이하 기시) 우리 일본에는 2세, 3세 정치인이 많아. 그 중에서 유독 우리 아베 신조가 뜨게 된 것은 사실 몇 년 안 되는 일이야. 대북 강경노선 덕분에 인기를 얻은 거니까. 지난 번에 북한이 미사일만 발사하지 않았더라도 경쟁자였던 후쿠다 의원이 총재 경선에 불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현 종전 직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는 처형당했는데요….
기시 나는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15년 동안, 우리 대일본제국이 잘못했다고는 결코 여기지 않아. 나 자신도 일본의 법률을 위반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어. 그 재판은 승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단죄가 이루어진 것에 불과해.
현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저도 잘못된 재판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한마디로, 천황 히로히토야말로 트리플A 전범으로 처형됐어야 했지요. 반면 처형된 A급 전범 중에는 책임이 극히 적은 사람도 있었지요. 아무튼 고이즈미 수상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와의 관계부터 설명을 해주시죠.
기시 준야군도 익찬(翼贊) 정치가 출신으로 나를 따르던 후배들 중 하나였지. 준야군의 별명이 안보남(安保男)이었지, 아마? 공직 추방을 당했었는데 내 후광에 힘입어 정계에 복귀하고 의원이 된 친구지. 미쓰야(三矢) 계획이 폭로되어 시끄러웠을 때 방위청 장관을 지낸 방위족 의원이었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가 의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익찬정치연맹 소속 정치인들이 ‘익찬 정치가’다. 이들은 천황을 보필해 ‘성전을 수행하는 군국주의 정치운동을 했으며, 익찬정치는 일본형 전체주의와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이었다.)
현 미쓰야 계획이 폭로되는 바람에 1965년은 아주 시끄러웠지요? 그 계획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을 가상하여 일본 자위대의 작전을 다룬 극비 계획으로 알고 있는데요. 말하자면, 일본판 ‘작계 5027’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기시 정치인의 가문을 따져서 그 정치인의 성향을 얘기하는 건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사태를 제대로 못 보게 할 수도 있어. 모든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스트니까 말이야.
현 고이즈미와 아베의 차이는 뭡니까?
기시 고이즈미는 낭만적이랄까 감상주의적인 데가 있는 반면 아베는 논리를 갖춘 확신범이라고 할 수 있어. 또 고이즈미는 신사 참배를 감행할지언정 태평양전쟁이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 하지만 아베는 달라. 아베는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당시 관방차관으로 강경 대응을 내세웠고, 지난 번 북한 미사일 사태 때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작성을 주도했지. 아베는 위안부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쪽이야. 거슬러 올라가서 1995년에 당시 무라야마 총리가 종전 50주년 반성 결의안을 국회에서 채택하려고 했을 때 아베는 ‘결의반대 의원연맹’ 사무국 차장을 지내기도 했지.
현 고이즈미가 예전에 자기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 비교하고 아베를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에 비교한 적이 있는데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기시 요시다 쇼인은 사상가고 다카스기 신사쿠는 행동가라고 할 수 있지. 나이 차는 아홉 살밖에 나지 않지만, 다카스기는 요시다 쇼인이 주재하고 강의하던 사설 학교인 쇼오카손쥬쿠(松下村塾)의 졸업생이야. 다른 졸업생으로 이토오 히로부미 등이 있지. 다카스기는 메이지유신 전에는 교토에서 테러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쵸오슈우번 출신의 대표적인 ‘유신 지사’ 중의 한 명이지. 죽어서는 야스쿠니신사에 묻혔고 말이야. 아베 신조의 ‘신’(晋)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데 아베 신타로는 다카스키 신사쿠로부터 신자를 따와서 이름을 지은 거라네.
현 하지만 아베의 정치 이미지는 부드럽지 않습니까? 베스트드레서로 뽑힌 적도 있고요, 부인은 한류 아줌마를 자처하기도 하고 있고요. 여성 유권자 상당수는 아베가 잘 생겨서 찍는다고 하던데요.
기시 그야 현대 정치는 이미지니까 당연한 거야. 하지만 아베는 속으로는 아주 강성이지. 게다가 정책통을 자처하고 있을 정도로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다네.
현 아베의 목표는 내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해서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갖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마는.
기시 야당인 민주당 대표로 최근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당선되었으니까 만만한 일은 아니지. 역량이 아주 뛰어난 데다가 산전수전을 겪은 오자와와 비교하면 아베는 어떤 점에서는 온실 속의 화초라고 볼 수도 있어. 따라서 아베가 내년 참의원선거 때까지 수상 자리를 그럭저럭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외로, 대외적으로 유화적인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네. 한국도 중국처럼 그런 사정에 주목해서 대일 외?전략을 제대로 세워야겠지.
현 마지막으로, 김정일과 박근혜 중에서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세요?
기시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겠나. 다만 내 눈에는 분명히 한반도의 2세들이 국가나 국민들보다는 자기 가문만을 더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인다네. 그래서는 우리 일본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어. 아베와 같은 모리파에 속했던 후쿠다 의원이 총재 경선을 포기한 이유는 아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 고이즈미, 비 아베’ 세력 앞에서 분열하지않기 위해서 였어. 반면에, 작통권 환수 문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바보 같은 태도를 보면 한국 보수 내지는 우익 정치인들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거지.
현 네에, 정말 ‘짱나는’ 일이죠(쩝).
■ 기시 노부스케(岸信介ㆍ1896~1987).
일본의 56, 57대 수상으로, 1957년 6월에서 1960년 7월까지 재임했다. 야마구치현 태생으로 아버지는 현 관리였으며 양조업을 했다. 원래 성이 기시(岸)였던 그의 아버지는 처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을 사토(佐藤)로 바꾸었다. 그런 탓에,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으로 역시 일본 수상을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와는 성이 다르다. 노부스케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태어났던 가문(實家)인 기시 집안의 친사촌과 결혼하고 양자로 들어가면서 다시 기시란 성을 갖게 되었다. 사토 가문 쪽 증조부는, 야마구치현의 옛 지명이자 메이지유신 이후 번벌 정치의 양대 지역적 기반의 하나였던 쵸오슈우번의 번사였으며, 조부는 한학자였다. 기시 노부스케의 딸은 통산장관을 지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와 결혼했는데, 이들의 둘째 아들이 바로 아베 신조(安倍晋三)다. 아베 신조의 친동생이자 참의원인 노부오(信夫)는 다시 외삼촌의 양자로 들어가서 기시 가문을 이었다. 아베 신조의 장인은 모리나가제과 사장이며, 아베 신조 큰형의 장인은 우시오전기 회장이다. 이렇듯 사촌과 결혼한다든가 처가나 실가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은 '이에'(家)의 대를 이어가기 위한 일본의 오래된 습속이며, 가문의 업을 이어받아 정치인이 되는 경우도 일본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기시는 도쿄제대 법과를 졸업했는데, 그의 고교 및 대학 동기 히라오카 아즈사(平岡梓)는 1970년에 자위대 건물을 점거하고 자살한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아버지다. 기시는 당시 도쿄제대 법과 출신 엘리트들이 흔히 들어가던 대장성이나 내무성이 아닌 농상무성(農商務省)을 택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기시는 만주국 국무원 실업부 차장을 지내면서 만주국의 산업 행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다. 당시 관동군에 근무하던 도조 히데키 등과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때이며, 이런 인연으로 태평양전쟁 말기 도조 내각에서 군수차관 등을 지낸다(군수장관은 수상인 도조가 겸임). 기시는 종전 직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수감되지만 맥아더사령부의 점령정책 전환 방침에 따라 1948년 석방돼 불기소 처분을 받게 된다. 1953년 중의원 의원이 된 그는 일본 재계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자유당과 민주당 보수 양당의 합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고, 1955년 새롭게 결성된 자유민주당의 초대 간사장으로 취임한다. 일본의 이른바 '55년 체제'의 최초 수상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그 다음은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이었는데, 기시는 이들 다음에 자유민주당 총재 겸 수상이 됐다. 이시바시 단잔은 자유주의자였고 하토야마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혼재된 노선이었던 반면 기시의 노선은 명백한 우익이었다. 기시 내각이 최초에 한 일은 군비 강화였다. 자위력의 범위 안에서 자위대의 핵 무장도 가능하다는 태도로, 평화헌법과 국민 대다수의 여론에 공공연하게 도전했다. 기시는 또 아시아개발기금 구상을 수립했는데, 이는 소련 및 중국의 대아시아 경제원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자금을 바탕으로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원조하려는 계획이었다. 1958년부터 미국은 일본과의 안보조약을 개정하여 일본을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보완자 및 동북아시아에서 반공 군사체제의 강력한 보루로 삼으려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기시 정권은,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실질적으로 사문화시키는 안보조약 개정을 시도했다. 이 새로운 안보조약은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군비 증강을 적극 도모하는 내용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동자, 학생, 시민 등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거센 국민적 반대투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기시 내각은 1960년 5월 일본 국회에 경찰을 끌어들여 야당 의원을 힘으로 몰아내고 새 안보조약 비준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같은 해 6월 안보조약이 발효한 직후 기시는 퇴진했지만 그 후에도 정ㆍ재계의 배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래 다이쇼기에서 쇼와기에 이르는 최후의 '유신 원로'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의 별명이었던 '쇼와의 요괴'라는 이름을 기시가 이어받게 된 것도 다 이런 사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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