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초기 요란스럽게 노사관계 개혁의 로드맵을 공표한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이 지난 11일 슬며시 그 용머리를 감추고 뱀꼬리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참여정부는 로드맵의 핵심 쟁점이라 할 수 있는 사업장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에 대해 무조건 향후 5년을 유예한다는 노ㆍ경총의 합의를 전격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다만 그 유예기간의 2년 단축과 정부 추진의 일부 법개정 사항에 대한 노ㆍ경총의 '양보'를 그 반대급부로 얻어내었다.
그 결과 지난 10년 동안 사문화되어온 두 개 법조항에 대해 한국노총과 경영계가 각각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해 그 시행을 또다시 연기하려는 '맞바꾸기식'의 거래에 대해 정부가 동참ㆍ편승함으로써 개혁의지를 크게 후퇴시키는 무책임한 국정운영을 보여주었다.
이번 9ㆍ11 노사정 합의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강변하는 정부의 입장은 궁색하다.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 선언문'에서 밝히듯이, 법 시행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우려한다면 3년의 유예기간 이후에도 그 쟁점조항들의 법제화는 여전히 미뤄지게 될 것이며, 지금 과연 이러한 법 개정을 재고할 만큼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또한 참여정부는 그동안 줄곧 노동정책의 핵심과제로 주창해온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의 핵심조항들인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에 대해 노ㆍ경총의 '뚝심있는' 담합행위에 백기 투항하듯이 굴복함으로써 스스로 노사관계 개혁의 일관성을 지키기보다는 현실 기득권에 타협ㆍ안주하는 한심스러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번 합의는 협의과정에서나 그 합의내용에 있어 정부가 한국노총ㆍ무노조대기업 사용자들을 편애하는 한편 민주노총과 조직대공장들 그리고 미조직 취약노동자들에 대한 전략적인 배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정부는 민주노총의 비타협적인 원칙 고수를 문제삼아 아예 협상과정에서 제외시킨 채 한국노총과 경영계 대표만을 상대로 로드맵 입법협상에 매달리면서 '반쪽짜리'의 타협에 연연, 이들(특히 한국노총)의 압박에 떠밀려 당초 노사관계 선진화의 개혁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정부의 이번 타협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총 산하의 대기업들과 공공부문에 대해서는 법적 제약을 존치하거나 확대하는 대신, 삼성 등의 무노조기업들에 대해서는 사업장 수준의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노조 조직화의 부담을 덜어주었던 것이다.
특히 최근 노사관계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복수노조의 허용을 유예ㆍ연기함으로써 노동법에 의해 그들의 단결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국제 노동기준 미달' 상태를 지속하게 만들어 노사관계제도의 선진화를 스스로 가로막는 자충수를 둠으로써 이후에도 국내외 비판여론의 표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밀실 협상을 통한 이번 노사정 합의사항은 입법예고를 거쳐 국회로 이송될 예정이고,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입법 저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을 다짐하고 있어 뜨거운 추투(秋鬪)가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개혁원칙을 잃어버린 채 뱀꼬리로 전락한 정부의 노동정책이 과연 가을 국회의 정치공간, 그리고 장외의 노정 대결국면을 어떻게 견뎌낼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이병훈ㆍ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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