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극단이 신생의 울음을 터뜨렸다. 최근 창단하는 극단들이 창단 이념과 목표를 가벼이 여겨 미덥지 않더니 최근 ‘제12 언어 연극 스튜디오’가 내건 설립 목표는 마음을 놓이게 한다. 극단측의 설명은 이렇다.
‘제12 언어’는 지구상의 언어 중 한국어의 사용 인구수가 대략 ‘12위’에 해당한다는 통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연극이 모국어 탐구의 장(場) 노릇을 한 지가 아득해 잊고 지냈는데 이를 일깨우는 참이다.
이 극단은 창단 공연으로 1990년대 일본에서 ‘조용한 연극’이란 미학을 제안한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따 오리자의 작품을 택했다. 연극 ‘과학하는 마음’은 시각적인 몽타주와 장면 구성의 동시다발성을 추구했던 현대연극의 실험성에서 나아가, 청각적인 동시다발성을 모색한다.
이는 19세기말 삶의 풍경을 여러 겹으로 배치해 일찌감치 관객의 인식 능력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던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홉이 21세기에 국적을 바꿔 재등장한 것만 같다. 17명의 배우들이 한 무대에서 들쭉날쭉 뒤섞이고, 끼어들고, 우연으로 충돌하는 대화 방식으로 혼잡을 가장한 채 정교한 질서의 운행을 펼친다.
연극은 과학과 마음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모순 형용을 나란히 놓고 풀어간다. 그리고 과학의 진행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다양한 딜레마들을 거론한다. 인간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학살하고 희생시킨 동물실험 문제라든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최후 요소에 관한 질문, 과학 하는 동기와 배후에 도사린 사랑, 집착, 구원 등 인간 욕망의 문제 등을 말이다. 이를 일상 언어를 시늉하는 촘촘한 대사들만으로 인류의 가까운 미래 앞에 놓인 삶의 문제적 상황을 진지하고도 담담하게 직조한다.
제도(制度)가 제도(諸島)가 되는 길. 현대연극 실험가 ‘유제니오 바르바’는 연극의 다양한 ‘섬들’에 관해 언급했다. 연극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다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제도가 극단이라면 극단을 창단하는 일은 곧 ‘새로운 관객의 몸이 누일 제도(섬들)를 찾아나서는 일’일 것이다.(연극평론가 안치운)
모국어에 대해 사유하는 극단이 창단 공연으로 일본 작가의 작품을 택했다는 게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교한 극술과 명료한 언어 구사로 쓰인 희곡을 제대로 무대에 올리는 작업 역시 모국어 소통의 외연을 넓히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극단으로 인해 좀 더 다채로워질 한국연극의 다양한 섬들(諸島)을 기대해 본다. 9월17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극작ㆍ평론가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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