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카와 미나토 지음ㆍ김난주 옮김 / 민음사 발행ㆍ9,500원
누구 말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 이 영악한 거대 도시에도, 예전엔 분명 전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논리와 개연성, 출처를 따질 필요조차 없던 그 옛날이야기들은 지금, 시커먼 아스팔트와 육중한 콘크리트에 파묻힌 채 화석으로만 남았다. 그 대신 이 불신의 시대, 그래서 되레 진실의 권위가 추락한 이 도시에서는, 컴퓨터 자판에서 확대 재생산된 정체불명의 ‘괴담’들만 정보의 바다를 부유할 뿐이다.
일본 작가 슈카와 미나토(朱川溱人)는, 이처럼 시대가 강요한 불신과 회의에 의해 멸종 당한 전설을 거대 도시의 한복판에서 감히 되살리려 한다. 작가가 소설집 ‘꽃밥’에 실은 여섯 단편의 ‘전설의 고향’으로 삼은 곳은 일본의 제2 도시 오사카의 뒷골목이다. ‘위험해서, 가난해서, 못 배워서, 이방인이라서’ 어느 곳보다 더 죽음이 삶에 가까이 다가 서 있는 곳. 그래서 그 뒷골목은 기구한 운명의 공간적 배경으로서 전설이 창작 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적당한 장소다.
표제작 ‘꽃밥’에서는 열병을 앓은 후 문득 전생(前生)을 깨달은 열 살 소녀가 생전의 아버지를 위로하러 떠나는 안타까운 사연이 펼쳐진다. 또, 병으로 죽어 도깨비로 환생한 한국인 소년 ‘정호’(‘도까비의 밤’)의 이야기에서는 빈민가에서 남 모르는 차별에 신음하는 재일동포들의 설움이 물씬 묻어나기도 한다. 항상 한 켠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 전설 속에는 죽은 자의 표독스러운 한(恨)이나 산 자의 막연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동화적 요소가 가미된 은유 기법을 통해,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전설이 시작되는 자리를 그저 따스한 시선으로 비춰줄 뿐이다.
지난해 일본 유수의 문학상인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코 끝이 찡하도록, 혹은 가슴을 아려가며, 때론 등골이 서늘하게,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느끼며 읽어 가는 아름다운 도시전설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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