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뜻의 요절(夭折)이란 말도 언제부턴가 우리 일상에서 사어화해버린 말들 중의 하나이다. 평균수명이 80세에 이를 정도라 나이 사십 전후에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드문 일이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엊그제 접한 역도선수 출신의 씨름꾼 이민우의 부고에 요절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향년 41세. 이민우가 누린 일기는 41년에 불과했으니 옛 기준으로라도 그는 요절하고 말았다.
짤막하게 전해진 부고에서 이민우의 신산했던 삶을 기억하자니, 사람좋게 웃는 그의 얼굴에 몇몇 다른 씨름꾼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보다 앞선 이들로 민속씨름 1세대에 속하는 이만기와 강호동, 그리고 그의 후배들인 최홍만과 이태현 등이다.
이민우는 장사(壯士)의 꿈을 꾸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역사(力士)였다. 1984년 아시아선수권대회,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역도 무제한급을 잇달아 제패하고 '아시아 최고의 역사'로 불렸던 그는 1987년 3월 태릉선수촌을 뛰쳐나왔다. 씨름으로 새출발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비인기종목의 설움과 가난을 당시 최고 인기였던 민속씨름판에서 떨쳐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생은 굴절됐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그의 소식을 듣고 말했다는 "괘씸한 놈"이라는 한 마디 때문이었던지 그는 역도연맹에서 영구제명됐고, 병역특혜도 취소됐으며, 씨름판에서도 한동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몇 개월의 낭인 생활을 거쳐 그는 계약금 4,000만원 연봉 2,000만원에 씨름단에 입단했지만 1995년 소속팀에서 방출되기까지 221전 114승 107패의 평범한 성적을 거두었을뿐 단 한 번도 장사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10년 넘게 까맣게 잊혀졌다 지난 9일 간경화로 사망한 그의 부고는 13일에야 뒤늦게 전해졌다.
지금이야 한 개인이 돈을 좇아 변신하는 일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로 여겨지지만 당시는 달랐던 듯하다. 이민우의 씨름판 진출 소식을 다룬 당시의 신문 스크랩에는 무슨 사상범 다루듯 '전향'이라는 표현에서부터, '국가대표는 공인'이라든가 '이민우가 참회하고 있다'든가 하는 표현까지 나온다. 당시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이기도 했으나 지금 그만큼 세상은 달라진 것이다.
이민우는 역도에서 씨름으로 갔지만 지금은 씨름꾼들이 시들해진 씨름판을 모두 떠나고 있다. 강호동이 출연하는 TV프로그램을 보는 젊은이들 가운데 그가 이만기를 눕혀 돌풍을 일으켰던 씨름꾼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최홍만은 K-1 진출 선언을 했을 때 씨름계의 배신자로 몰렸고 천하장사 족보에서 영구제명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최홍만의 성공을 보고 격투기에 뛰어든 민속씨름 최다승기록 보유자 이태현은 데뷔전에서 1회 TKO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민우가 장사를 꿈꾸며 생의 방향을 틀었던 민속씨름은 이렇게 20여년도 안돼 고사하고 말았다. 지금은 씨름판 개혁을 주장하던 이만기가 한국씨름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당한 일이 또 한창 시끄럽다.
우리 씨름판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멀리 민족사를 이야기할 것도 없이 암울했던 1980년대 그나마 사람들을 신명나게 했던 것이 민속씨름이다. 씨름을 다시 살려나갈 방안을 씨름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기 바란다. 요절한 역사 이민우의 삶도 그래야 덜 안타깝게 여겨질 것이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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