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정말이지 여우가 무서웠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여우들이 사악하고 머리 좋고 둔갑 잘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둔갑'이 무서웠다.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꿈에 볼까 무서웠던 여우에 대한 그 무섬증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놀이를 하면서, 잠자고 세수하고 밥 먹는 여우한테 '잠꾸러기' '멋쟁이'라 읊으며 묽어졌다. 그 놀이 역시 '죽었니? 살았니?' 묻고 그 대답을 기다리며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결말로 치닫지만.
그 즈음 내가 또 무서워한 것이 안방 벽에 걸린 달력의 여우(女優)였다. 방 안 어느 자리에 있어도 그 여배우의 시선이 나를 쫓아다녔다. 달력에서 튀어나와 내게 해코지를 할 기회를 엿보는 듯. 어쩌다 방심해서 혼자 안방에 있게 될 때, 문득 등골이 서늘해 달력을 쳐다보면 여지없이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소름이 돋아 허둥지둥 나오곤 했다.
나이가 들면 불합리한 무섬증이 줄어든다. 가령 야간산행을 할 때, 갑자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나 숨을 죽이게 된다. 산중 개소리는 인적과 다름없다. 그 순간 정체 모를 낯선 이의 들숨날숨이 훅 끼치는 듯해진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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