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친카(딸아), 라지 제뱌 야 브리슬라(네가 있어 내가 왔다).”
엄마는 1만1,500㎞를 내쳐왔다. 5년 반 만의 모녀 상봉이다. 사무치게 보고팠던 딸 앞에서 엄마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딸도 눈물샘이 터졌다. .
딸은 매일 엄마 꿈을 꿨다. 깨면 늘 아릿하게 사라졌지만 이날만큼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는 엄마의 숨결이 따사롭다. “진정 꿈은 아니겠지. 마마(엄마)!”
러시아 연해주 땅 파르티잔스크는 벌써 삭막한 초겨울 바람이 불어댔지만 11일에는 아름답고 따뜻했다. 러시아에서 우리나라로 입양된 장수인(러시아 이름 나스다ㆍ17ㆍ전남여고1)양과 친엄마 바스카에바 올가(56)씨가 극적으로 재회했기 때문이다.
국가청소년위원회 산하 한국청소년진흥센터가 4일 연해주로 파견한 ‘대한민국 청소년자원봉사단’(11일 A8면) 174명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이들은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작은 정성을 모아 올가씨의 여비 180만원을 마련해줬다.
마즈도(모스크바 남쪽 2,000㎞)에 살던 수인이는 2001년 4월 한국에 왔다. 러시아에 머물던 장병정(52)씨 부부가 활달하고 귀여운 소녀 나스다를 눈여겨보다 입양을 결정했다. 올가씨 역시 6남매 중 막내 나스다 만큼은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돈이 없으면 러시아에선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다”고 했다. 교회 차량 운전으로 매달 버는 6,000루블(약 24만원)은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
모녀는 이후 몇 차례의 전화통화를 제외하곤 5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난달 수인이는 올가씨에게 가슴 벅찬 이메일을 보냈다. ‘틈틈이 자원봉사를 했는데 광주시 추천으로 9월 러시아에 봉사하러 가요.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엄마는 딸에게 “꼭 가마”라는 답장을 보냈지만 막막했다. 그는 서툰 한국말로 “돈이 없어서”라고 설명했다. 딸을 만나기 위해선 4만8,000루블(192만원)이 필요했지만 올가씨에게는 엄두도 못 낼 거액이었다.
엄마는 결국 8일 딸에게 “못 가겠노라”고 눈물로 전화했다. 사연을 접한 봉사단 서성갑 단장이 “수인이를 돕자”는 제의를 했고, 단원들은 모금에 나섰다. 봉사단의 연락을 받은 올가씨는 9일 이웃에게 돈을 빌려 마즈도에서 1만1,500㎞ 떨어진 파르티잔스크까지 딸을 찾아 나섰다.
올가씨는 “수인이를 혼자 보낸 게 늘 걱정이었는데 마음 착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주신 여러분은 나의 프라트(형제), 세스프라(자매)”라고 감사해 했다.
수인이는 “통역사로 활동하며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엄마에겐 “한국에서 함께 살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기다려달라”고 했다. 모녀는 봉사단이 속초로 떠나는 13일 자루비노항에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