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결정하면, 회담이 열리기 전에라도 북미 양자대화를 수용할 수 있다는 미국의 입장을 최근 중국을 통해 북한측에 전달한 것으로 12일 확인됐다. 힐 차관보의 이 같은 입장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야 양자회담 수용’이라는 미국의 기존 입장에서 다소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안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북한이 끝내 이 방안을 거부할 경우 안보리 결의(1695호)를 바탕으로 한 대북제제에 나설 방침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미 양자대화 해법이 나오지 않는 한 본격 제재국면이 전개될 전망이다.
12일 한중일 3국 순방을 마친 힐 차관보는 한국을 떠나며 “유엔 회원국들이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 내용을 담은) 안보리 결의를 이행해야 하며, 이렇게 되도록 지켜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또 이 달 중순부터 열리는 유엔 총회 기간 북한문제 논의를 위한 다자회동도 추진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북한의 반응에 대한 미 정부의 실망에 기인한다. 힐 차관보는 이번 순방을 통해 북한 문제의 외교적 해법 마련에 안간힘을 썼다. 우선 그는 5일부터 엿새간의 중국 체류기간 북한측 파트너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의 대화를 추진했다. 사전에 뉴욕채널을 통해 북측의 의중을 파악한 정황도 감지된다.
특히 힐 차관보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회담 일정 정도가 잡히면 그 이전에 금융제재 문제를 협의할 북미 양자대화도 가질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까지 중국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고 한다. 북한이 그 동안 주장했던 ‘선(先) 금융제재 해제 후(後) 6자회담 복귀’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절충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까지는 이 제안에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미사일까지 쏘아댔지만 전반적으로 대화 보다는 압박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의 태도가 북측의 ‘방어본능’을 자극했을 수 있다. 또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입장에서는 체제의 목줄을 죄는 금융제재도 마땅치 않다. 정부 관계자는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에서 자존심까지 구기며, 결과도 보장되지 않는 회담에 나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묵묵부답은 거꾸로 미국의 자존심을 긁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조만간 클린턴 행정부 시절 완화했던 대북 경제제재를 다시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안보리 결의안에 따른 제재 이행도 각국에 요청하고 있다. 또 미국은 7월말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진행됐던 10자회동과 유사한 다자회동을 추진, 북한을 압박할 태세다.
곤란해진 것은 한국 정부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끼어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6자회담의 신뢰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다자회동도 가능하다”고 미국에 동조하면서, 동시에 “다자회동이 큰 실효성은 없을 것”이라며 회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또 미국의 안보리 결의안 이행 요구에 대해서도 정부는 “한국 만큼 북한에 대해 철저한 제재를 실행하는 국가가 어디 있느냐”며 미국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결국 해법찾기는 14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이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정부 당국자는 “제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며 “미국도 대화를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복심인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11일 “다양한 형태의 대화를 탄력적으로 가질 필요가 있다”며 미국측의 유연한 자세를 주문했다. 힐 차관보가 북미 직접대화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듯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도 전향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북한도 이에 화답할 가능성은 있다. 물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고 전망한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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