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발표된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 노사정 합의내용에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제 도입의 3년 유예 이외에도 중요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우선 2008년 1월부터는 필수공익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돼 온 직권중재제도가 폐지된다. 직권중재제도는 그 동안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을 사전에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중앙노동위원회가 필수공익사업장의 노사 분규에 대해 직권중재 회부 결정을 내리면 노조는 15일 동안 파업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에 노사정이 직권중재 폐지에 합의함으로써 병원 철도 등 필수공익사업장의 노조는 제한 없이 파업 등 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노사정은 직권중재제도 폐지에 따른 노조의 무분별한 파업을 막기 위한 장치도 동시에 마련했다. 최소업무유지 의무와 대체근로 허용이다. 이에 따라 필수공익사업장의 노조는 법으로 정해진 최소업무를 반드시 유지한 채 파업 등 쟁의를 해야 한다. 예컨대 병원노조가 파업을 하면 수술실 등 중요 업무는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 된다. 노사정은 또한 필수공익사업장 파업 때 대체근로자 투입도 전면 허용하기로 했다.
노사정은 취약 근로자 보호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근로기준법을 개정키로 했다. 이 같은 차원에서 노사정은 부당해고를 한 사용자에 대한 벌칙조항을 삭제키로 했다. 또한 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라고 판정한 근로자는 원할 경우 직장에 복직하는 대신, 금전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기로 했다. 경영상 정리해고를 할 때는 현행 60일인 사전 통보기간을 기업규모 등에 따라 60~30일로 완화하는 방안에도 합의했다.
정부가 막판에 한국노총이 제안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제 도입의 3년 유예를 무조건 수용하기로 한 것은 “개혁보다는 노정 관계의 파국을 막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당초 정부는 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쟁점인 두 제도에 대해 1년 유예를 고려하고 있었다.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 등 산적한 국정 현안을 푸는 데 노동계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점도 생각했다. 민주노총이 이미 정부의 노사관계 로드맵 추진에 반발하며 협상장을 뛰쳐나간 마당에 한국노총마저 정부에 등을 돌릴 경우 정부의 개혁정책이 탄력을 받지 못한다는 판단이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노조 전임자 문제와 복수노조제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지키기 위해 나머지 합의된 사항을 모두 버릴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합의의 최대 수혜자는 한국노총이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제가 시행될 경우 재정기반이 열악한 한국노총의 타격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노총은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ㆍ태평양 지역 총회에서 철수한 데 이어 단식농성을 선언하는 등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반면 일찌감치 노사관계 로드맵 협상을 거부한 민주노총은 복수노조제 도입을 통한 세력 확장 전략이 물거품이 됐다.
정부로서는 일부 반발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제 수준의 노사관계 법ㆍ제도를 마련했다는 소득을 얻었다. 재계는 부당해고 처벌조항 삭제 등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게 됐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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