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아시아 연극연출가 교류전에서 ‘생사장’(生死場)으로 한국 연극과 인연을 맺은 중국 연출가 티엔친신이 원대의 고전 희곡 ‘조씨 고아’ 각색본을 들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 여성 연출가는 연극 ‘생사장’을 통해 브레히트 서사극의 원조가 중국 전통극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일본의 침탈 아래 굴하지 않은 중국 민중의 힘을 서사극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극단 ‘미추’와 함께 올린 이번 공연 ‘조씨 고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극의 주인공들이 던지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담고 있다. 고아 소년 조원종이 16세의 성장통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출생의 비밀이라는 닫힌 봉인을 연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 혈전의 줄거리.
원작은 인간의 첨예한 권력 투쟁, 충신과 간신의 유교적 충의(忠義) 구도를 충실히 좇고, 권선징악으로 끝난다. 티엔친신은 이 고전의 맥락을 크게 훼손하지 않되 시각화에 중점을 둔 각색을 택했고, 이로써 매우 탐미적인 무대 미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집단에 종속된 개인이라는 동양적 시선을 벗고 삶의 사안과 상황 앞에서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하는 서구적 의미의 ‘개인’을 부각시켰다. 또한 인간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인간이란 타인에 의해서는 평판과 소문으로 분열되는 존재이면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기억의 왜곡과 욕망의 투사를 통해 사분오열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각 인물의 분신들을 무대 위에 나란히 세운 이유일 것이다.
공연은 붉은 빛 강렬한 색채의 의상에 소매를 쉬이 뺄 수 있도록 한 일본 무사복 형태의 윗옷, 주름바지 등 가부키 복색을 연상할만한 스펙터클로 채워졌는데, 이로써 일본적인 미의식을 중국의 서사틀 안에서 한국 배우의 몸으로 선보이는 형국이 되었다. 외국 연출가가 국내 배우들과 작업할 때 극의 언어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실험에 치우치는 경우가 왕왕 나타나곤 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일까?
분명한 목표와 철학을 갖지 못한 연극 교류란 결국 미학적 호사 취미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케 하는 이러한 공연 형태 앞에서 마음 한쪽이 불편해진다. 한편으로는 서양이 가져다 쓰는 동양적 이미지에는 관대하면서도 동양권 안에서 뒤섞이고 인용하는 것에는 왜 생경함을 느끼게 되는 건지,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공연임에는 틀림없다. 9월 14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극작ㆍ평론가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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