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우리 고대사 왜곡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해법이 아닙니다. 지금은 문제의식을 거품처럼 부풀려 확산하기보다는 그 깊이와 농도를 심화해야 할 때입니다.” 고구려연구회 한규철(경성대 교수ㆍ사진) 회장은 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발해사 왜곡 논문 발표와 관련, 야당 및 일부 언론의 대대적인 ‘대정부 때리기’는 과도할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왜곡할 소지마저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접근방식에 문제는 없나.
“문제가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정치권이 이 문제를 정략화 하는 것 같다.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ㆍ운영하고, 현안에 대해 중국 정부와 학술적 협의를 모색한 2004년의 ‘5개항 합의’ 등 성과와 실적은 결코 폄하해서는 안된다. 동북공정이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한 덩어리로 묶여있는 사안인 만큼 중국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 동북공정은 학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다. 거기에 우리가 정치적, 정책적으로 휩쓸려 드는 것은 바람직한 해법이 아니다. 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부 역할은 없다는 얘기인지.
“정부는 거시적, 장기적 관점에서 고구려사 및 발해사 연구 여건을 조성하고 결실을 맺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 점에서 27일 출범 예정인 동북아연구재단이 이전의 고구려연구재단과 달리 정책적 기능을 포괄한다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 정책에 의해 순수 연구가 좌우돼선 안된다.”
이 대목에서 한 교수는 중국 정부의 접근방식이 부럽다는 말을 했다.
“동북공정이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지역인 동북3성을 개발하기 위해 선택한 첫 걸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였다면 도로 닦고 아파트 짓는 식으로 덤벼들었을 이 계획을, 그들은 역사적 정당성을 다지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들이 발해사를 중국 고대사에 편입하려는 시도는 이미 1980년대에, 신장지역의 ‘서북공정’, 티벳지역의 ‘서남공정’과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정부와 정치권의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단 말씀인 것 같은데.
“즉자적으로 비판하자면 국회 특위를 생각해보자. 만들어만 놓고 진지한 노력 없이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성명서나 발표하는 식으로 유명무실하게 활동해오지 않았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비판은 우리 역사에 대한 홀대다. 국가고시에서 ‘국사’과목이 사라지고, 학교에서도 국사는 쉬운 선택과목에 밀려 외면당하고 있다. 저처럼 자리(직장)를 잡은 학자는 운이 좋은 경우다. 발해사를 전공한 국내 박사급 연구자 13명이 여전히 생계를 걱정하고 있고, 동북아재단에 소속된 학자들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계약직이다.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고맙기까지 하다.”
-(그런 여건 하에서도) 학계의 역할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물론이다. 고구려사의 경우, 국제학계에서 한국인의 고대역사서로 인정 받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등 문헌자료가 있다. 왜곡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반면 발해사는 문헌이 거의 전무하다. 우리 교과서는 어떤가. 여전히 일본 학계가 터를 닦아놓은 ‘지배층-고구려 유민, 피지배층-말갈’식의 발해에 대한 이분법적 국가 규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내 학계에서조차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지 않는 입장이 있고, 한국사로 보려는 입장을 민족주의, 국수주의라고 비판하는 진영도 있다. 심지어 국사해체론까지 언급된다. 중국 학계와 토론하기에 앞서 우리끼리 이 다양한 이견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심도 있게 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언론과 시민단체에 대해서도 비판과 당부를 보탰다.
“관심을 갖고 적극 나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중국이 발해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한 게 처음이 아닌데, 마치 난리라도 난 듯 언론이 떠드니까 국민들이 현혹되는 거다. 또 그것을 기화로 치고 받는 정치권의 정략 다툼을 부추기는 것이다. 언론도, 시민단체도, 국민 감정을 자극하는 식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동북공정 문제는 단기간에 감정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측이 비학술적의도로 문제를 촉발한 만큼, 우리의 학술적 대응이 모든 문제를 풀어낼 만능의 열쇠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 다시 말해 정부와 정치권, 학계 시민단체 언론이, 확고하지만 침착하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 교수는 “어차피 분위기가 부풀려 알려진 만큼, 내주쯤 고구려연구회 차원에서 이번 사안에 대해 정리하고, 선언적 의미에서나마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긴급학회를 소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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