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 장미와 빗방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장미와 빗방울

입력
2006.09.08 00:02
0 0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게 하던 더위가 물러가면서 당장 반갑게 피부에 와닿는 것은 상쾌한 공기의 촉감이다. 초가을의 공기가 상쾌한 것은 낮아진 온도의 효과도 있지만 그에 따라 낮아지는 습도의 영향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가을로 접어들면서 체감할 수 있는 온도와 습도의 관계에는 자연 현상에 폭넓게 적용되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다. 사회 현상을 사람 개개인, 또는 가족이나 민족 같은 사람의 집단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할 수 있듯이 자연 현상도 크게 보면 입자들과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설명된다.

● '탕자의 비유'가 알려주는 사랑

그런데 어느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입자와 어떤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지는 온도에 달려있다. 잘 알려진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아 수중에 큰 돈이 생긴 탕자는 집에 붙어있지 않고 밖으로 나돈다.

탕자의 운동에너지가 커진 셈이고, 그것은 온도가 높아진 것에 해당한다. 탕자가 돈을 탕진하여 춥고 배고파져서 기력이 떨어지면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 상황에서 탕자에 작용하는 가장 강한 힘은 탕자와 아버지 사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구호단체나 정부도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날씨가 더우면 강과 바다의 물이 증발하고 공기 중에는 높은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나돌아 다니는 물분자들이 많아진다. 그러면 땀이 나도 이미 공기 중에 수분이 많기 때문에 빨리 증발해서 몸을 식혀주지 못하니 이래저래 후덥지근한 것이다. 이 때 공기 중의 물분자들 사이에는 중력과 전기적인 힘이라는 두 가지 다른 힘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 중 만유인력이라고도 불리는 중력은 문자 그대로 질량을 가지는 모든 물체들을 서로 끌어주는 힘이기 때문에 물론 물분자들 사이에도 작용한다. 그러나 중력은 물분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전기적인 힘에 비해 아주 약한 힘이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아버지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온도가 높을 때는 운동에너지가 높은 물분자들은 중력도 전기적인 힘도 뿌리치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러나 기온이 떨어지면 물분자들의 운동에너지도 떨어진다. 그러다가 전기적인 인력보다 기력이 낮아지면 물분자들이 모여들어 밤 안개, 아침 이슬, 그리고 빗방울이 된다. 이 때 물분자들 사이에는 물론 중력도 작용하지만 중력은 물분자들을 끌어모아 빗방울을 만들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힘이다.

어떤 빗방울은 늦여름에 핀 장미(the last rose of summer) 꽃잎에 떨어진다. 물분자들이 뭉치는 데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한 중력도 공기 중에서 만들어진 물방울이 빗방울이 되어 장미꽃 위에(raindrops on roses) 자리잡게 하는 데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방울과 지구 사이의 중력에 의해 빗방울이 장미에 떨어지는 순간에도 전기적인 힘이 물분자들을 붙잡아서 빗방울로 유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웬만해서는 다시는 끊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자연을 닮은 인간사회 결속의 힘

인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에도 힘의 단계가 있다. 물분자들을 붙잡아 빗방울을 만드는 힘이 있듯이 물분자 내에서도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를 결합해 주는 힘이 있고, 수소나 산소 원자 내에서는 양전기를 띤 원자핵과 음전기를 띤 전자를 묶어주는 힘이 있다.

유엔, 국가, 지방자치단체, 아파트 단지, 가족 순서로 작은 단위로 갈수록 결속력이 강해지듯이 빗방울, 물분자, 원자, 원자핵으로 갈수록 입자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강해진다. 장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미와 빗방울 속에 숨겨진 미시세계는 신비롭고 흥미진진한 세계이다.

김희준ㆍ서울대 화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