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가 유행가를 연구한다고 하니 특이한가요?”
영남대 국문학과 이동순(56) 교수가 192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의 가요시(노랫말)를 연구한 책 ‘번지 없는 주막-한국 가요의 번지를 찾아서’(도서출판 선)를 이 달 말 출간한다.
대학교수가 가요 노랫말을 연구한다고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이 교수는 1973년과 89년 시와 평론으로 2회나 당선된 경력이 있다. 이미 13권의 시집을 발표했고, 백석 권환 조명암 이찬 등 묻혀있던 재북 또는 월북작가를 다시 세상에 살려놓는 등 문단에서의 업적이 만만치 않다. 이런 정통 문인이자 국문학자가 ‘정색을 하고’ 대중음악의 노랫말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업은 정말 ‘특이하다.’
가요시 연구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대중예술의 천박한 지위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했다. 문학이든 가요든 대중이 향유하는 문화는 고립되거나 소외된 것이 없다. 대중예술은 투박해 보여 깔봄을 당하지만 파고 들어가 보면 결코 무시해선 안 될 예술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일제시대 가요시에 나타난 현실 의식’이란 논물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교수들의 반응은 이상했다. 조명암의 시 중 ‘선창’, ‘알뜰한 당신’이 있다고 하니까, “내가 아는 노랜데 한 번 불러보라”며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다. 시가 심플하면 ‘무슨 유행가 가사 같냐’며 깔보고 꺼리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들에게 일일이 대꾸하지 못했다.
“우리 가요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한 가치 있는 분야이지만 ‘딴따라’로 불린다. ‘딴따라’라는 모욕적인 칭호에는 가요계 바깥 뿐 아니라 가요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위상을 스스로 높여가야 하는데 인기와 돈만 얻으려 하니 대중가요 전체의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다. ”
이번 책은 월간지에 1년 연재했던 칼럼을 뿌리로 여러 곳에 기고했던 원고들을 모았고 강연, 방송 원고를 묶은 것이다. 500쪽 분량의 책 1부는 딱딱하고 현학적인 설명이 아닌 그가 노래를 즐기게 되었던 어릴 적 추억을 통해 노래가 우리들을 얼마나 윤택하고 풍부하게 해주는가에 대해 말한다.
2부는 노래로 들어보는 한국현대사라는 주제로 만주, 돈, 철도, 항구, 기생, 만요, 4월 혁명, 베트남을 주제로 한 노래들을 테마로 다뤘다. 3부는 남인수, 이난영, 백년설, 이미자 등 그 시절 한국가요사의 ‘별’을 다뤘다. “이 책은 가요의 배경이나 가요 자체에 대해 의미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른 것만이 아니라 담고 있는 숨은 이야기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
‘가요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일제 때 많은 노랫말을 쓴 전 서울사대 교수 이하윤. 그 다음은 시인 조지훈이다. 조 시인은 자신의 시 전집에 식민지시대 가요 가사에 대한 품격 높고 학문적인 해설을 붙였다. 하지만 “이 일을 미완으로 마치지만 반듯이 의욕을 가진 후학이 나타나 가요시 연구를 마무리를 하길 바란다.”고 써놓았다. 이 교수는 이 글을 읽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노래에 대한 특별한 인연을 묻자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운명인 것 같고 기질인 것 같다”는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생후 10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동냥젖을 먹이며 키웠기에 그의 소년기는 슬픔에 민감했다. 오동나무가 서걱서걱한 소리만 내도 슬프고 달빛만 봐도 슬펐다.
그때 진공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백설희 송민도 노래는 왜 그런지 좋았다. 10살 즈음 동네 친구 집에서 그의 아버지가 아끼는 유성기를 돌리다가 고장을 내버렸다. 혼줄이 났지만 그때의 구수한 축음기 음반 소리들은 그의 마음속에 입력돼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마당이 넓은 낡은 집에 세를 들어 이사를 갔다. 집주인이 창고를 개조하고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축음기 소리와 붉은 조명, 빙글빙글 돌아가는 분주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했다. 세칭 비밀 사교 홀이었다. 매일 듣게 된 아코디언, 섹소폰 소리에 그만 정신이 혼미했다. 여느 때처럼 사교 홀 문 앞 울타리에서 소리듣기에 정신이 없는데 직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등을 때렸다. "싹이 노란 놈이다."
중학생 때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반 거리 중간에 있던 친구네 집은 정말 잊지 못할 장소다. 친구의 어머니는 혼자였다. 초록빛 등이 들어오는 전축을 틀어놓고 한 잔 술에 과부의 설움을 달래곤 했다. 처음으로 많은 전축 음반을 보고 듣느라 해 지는 줄도 몰랐다. 대학노트를 2권에 음반에 적혀있는 노래 가사를 다 적고 외웠다.
당시 그는 특히 어머니에 대한 노래들을 좋아했다. 백년설의 '어머님 사랑',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 남인수의 '어머님 안심하소소'는 그가 가슴으로 절절하게 불렀던 노래들. 유행가를 통해 어머님에 대한 허전함을 달래며 대리만족을 했다. "모성에 대한 갈증과 문학적 시적 정서가 그런 노래가사의 정서와 결합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시절 1930년대 노래를 줄줄 불러대는 중학생 이동순은 친구 부모님들에게 별난 아이로 비쳐졌다. 친구들도 저녁을 얻어먹으며 노래를 불러주는 그를 괴물 취급했다. 고교 때는 소풍을 가 벌어진 반 대항 노래자랑에서 최고상은 늘 그의 몫이었다.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그의 노래실력을 아는 중국 청도에 있던 한 선배가 초청을 해왔다. 150명이 모인 청도의 한국인 식당에서 어머니를 테마로 한 노래를 부르니 죄다 눈물을 훔쳤다. 그는 이후로도 독일 탄광 한인마을 등 해외 리사이틀(?)을 수 차례 갖기도 했다. 이쯤 되면 대중음악을 연구하는 국문학자가 아니라 진짜 대중음악인인 셈이다.
2003년 가을부터는 대구mbc의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프로 개편 때마다 프로가 사라질까 걱정했는데 이젠 간판프로가 되어 청취자상까지 받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마침 그의 방송을 듣게 되었다. 9월 첫 회 최초의 직업가수 채규엽편 방송이었다. 마치 그 시절 변사 같은 느릿하면서 또렷한 발음과 구수한 설명은 유성기 음반을 듣는 착각이 들었다. 한 팬클럽 회원은 "가요프로에서 다루는 노래는 인기가요 위주인데 교수님은 잘 모르는 노래만 다루지만 자세한 해설이 곁들여지니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동순 교수는 앞으로 가수, 작곡가, 작사가별로 연구를 하려 한다. 주로 그들의 노랫말을 재음미해 새로운 각도로 가요사를 해석해 보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대구=글ㆍ사진 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 소문난 노래꾼 교수 이동순 "둘째 가라면 서러워"
이동순 교수는 소문난 노래꾼이다. 그래서 별난 무대를 만들기도 했다. 오랫동안 문단에서 노래 지존의 자리를 지켰던 김지하 시인과 이동순 교수의 노래대결은 문인들 사이에선 한 편의 흥미진진한 무협지에 버금가는 전설적인 일화이다. 당시 시합의 배심원이었던 소설가 김성동씨가 이 일화를 이동순 교수의 1987년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 에 적어 더욱 유명해졌다.
1980년 긴급조치 9호 해제로 풀려나온 김지하씨는 충북대 국문과에 노래를 잘 부르는 이 아무개 교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노래시합을 청했다. 이씨는 전갈을 받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선뜻 응했다. 참관인을 대동하고 김씨가 청주로 내려왔다. 결전의 시간이 가까워 오자. 그래서 노래 부를 곡명을 커닝페이퍼처럼 준비했다.
초저녁에 만나 국밥을 든든하게 먹고 소주와 안주를 마련해 밤새울 준비를 하고 시합장으로 갔다. 장소는 고 전혜린씨의 동생인 전채린씨의 13평 주공아파트. 강호의 고수 김지하씨와 이동순씨가 마주보고 앉았다. 긴장감이 팽팽했다. 배심원은 소설가 김성동, 철학자 윤구병, 전채린 당시 충북대 불문과 교수, 한국무용가인 부산대 채희완 교수로 구성된 4인방. 우선 룰을 정했다. 무시무시했다.
#룰1: 순서에 의해 앞 사람의 노래가 끝나면 3분 안에 노래가 나와야한다.
#룰2: 기본 2절까지 부르면 0점이고 3절까지 부르면 1점, 1절 밖에 못 부르면 마이너스 1점. 가요가 아닌 동요나 가곡은 마이너스 1점으로 한다.
#룰3: 같은 노래를 반복할 시에는 게임이 끝난다.
초저녁인 8시에 시합은 시작되었다. 몇 곡이 오가자 김지하씨는 ‘별 놈 다 보네’ 하는 표정으로 ‘어라’ 하더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쥐어짜는 듯 바이브레이션에 고음 부분에서는 안간힘, 용을 쓰는 김지하씨 특유의 창법을 구사하며 상대의 기를 죽이려 했다. 이 교수는 잔잔하게 물이 흐르듯이 힘 안 들이는 창법으로 응수했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어느덧 새벽 4시가 지나갔다. 그 동안 300곡을 주고받았다. 흥미로운 시합에 배심원들의 눈망울은 모두 초롱초롱했다.
처음에는 유명하고 쉬운 곡으로 시작해 상대방 기를 꺽기 위한 어려운 노래로 이어졌다. 김지하 시인이나 배심원들이 잘 모르는 듯 표정을 지으면 이 교수는 희열을 느꼈다. 새벽 5시쯤 본전이 떨어진 김씨가 ‘어이 징그럽구나’하고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이날의 시합은 소문을 타고 문단에 전해졌다. 이후 이교수가 서울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유명한 이 아무개 노래 한번 들어보자’며 문인들이 일부러 찾아왔고 가요에 대한 연구와 글을 쓰게 된 계기도 되었다.
최규성 편집위원 kscho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