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할리우드 최고의 바람둥이 워렌 비티와 ‘유럽의 보석’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배우 이사벨 아자니가 대서양을 오가며 떠들썩한 염문을 뿌렸다. 남녀가 사랑을 나눈 게 무슨 죄가 될까. 단지 그들이 세계적인 스타라는 사실이 눈길을 사로잡을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프랑스 언론은 둘의 로맨스를 놓고 한바탕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거봐라. 콧대 높은 프랑스 배우도 어쩔 수 없다. 역시 워렌 비티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프랑스의 황색 언론은 “아자니가 미국의 불한당과 사귈 이유는 절대 없다. 미국측의 모략이다”고 맞섰다. 적대국은 아니지만 문화적 우월성을 두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나라이기에 가능했던 일. 그때는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지, 별 유치한 자존심 싸움도 다 있다’ 싶었다.
요즘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ㆍ일 네티즌들이 80년대 미국-프랑스 언론 못지않은 수준 이하의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다.
포문은 일본 네티즌이 먼저 열었다. ‘괴물’의 괴물이 일본 애니메이션 ‘WX 기동경찰 페트레이버’의 극장판 3편인 ‘폐기물 13호’의 괴생물체를 표절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 국내 네티즌은 “‘폐기물 13호’가 오히려 ‘에이리언’을 표절했다”며 바로 반격했다. 불똥은 ‘일본 침몰’로 튀었다. 국내 일부 네티즌은 미국의 재난 영화 ‘투모로우’를 베낀 것에 불과하다며 불매 운동까지 나서고 있다.
한일 관계는 이성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소 축구와는 담을 쌓던 사람도 한일전이라면 혈액순환이 빨라지고 심장 박동수가 거세진다. 지난 주말 국내에서 40만3,043명을 불러모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일본 침몰’의 흥행 성적도 이런 ‘민족 정신’이 먹혀 든 결과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는 자극적인 포스터 문구는 반일(反日)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애국심은 애국심, 영화는 영화다. 표절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이 논쟁을 벌이고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지극히 소모적이다. 극단적인 반일 정서와 혐한류(일본서 한류를 혐오하는 현상), 좀 더 세련되고 생산적으로 바뀔 수는 없는 걸까.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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