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 연구센터가 웹사이트에 올린 논문 내용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5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일부 학자는 “중국이 정치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며 중국의 의도를 경계했다.
발해의 정식 국호가 말갈?
변강사지 연구센터는 발해의 주도세력이 말갈이며, 발해 초기 정식 국호도 말갈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발해사를 연구해온 한규철 고구려연구회장은 “당시 말갈은 특정 민족이 아니라 변방의 주민을 통칭하던 일반명사였다”며 “발해 건국 세력은 백두산 부근의 백산말갈,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이며, 대조영도 속말말갈에 속했다”고 말했다. 역시 발해사 전문가인 이병건 동원대 교수는 “고구려에는 여러 민족이 살았는데, 나라가 망한 뒤 그들이 발해를 세웠다”며 “발해를 세운 사람은 분명 고구려인이었다”고 말했다. 국호 문제에 대해 한 회장은 “발해는 개국 초부터 ‘진’(震) 또는 ‘발해’라는 이름을 썼는데 당이 발해를 말갈로 낮춰 불렀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발해는 당의 지방 정권?
대조영 등 발해의 왕이 당의 책봉을 받았다는 이유로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것은 억지라고 한 회장은 주장했다. 조공은 관영 무역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당이 왕의 책봉과 조공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중앙과 지방 정권 차원이 아닌 왕조 대 왕조 관계에서 이뤄진 국제적 외교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묘 형태, 풍습 등이 다르다?
변강사지 연구센터는 발해의 분묘 형태, 장례의식, 기물과 도기 등이 고구려 것과 다르다며 두 나라의 차이를 부각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한 회장은 “발해인은 고구려인과 마찬가지로 석실묘, 석곽묘를 만들었고 고구려인처럼 온돌을 사용했다”고 강조했다. 945년 완성된 구당서(舊唐書)에도 발해와 고구려의 풍속이 같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자가 고조선을 다스렸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뒤 기원전 11, 12세기께 중국에서 기자가 건너와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에 대해, 국내 학계에는 기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와, 그 존재는 인정하되 고조선의 외곽에 머물렀을 뿐 정권도 잡지 못했다는 견해가 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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