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십시오. 대통령님의 독선을 지적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 저는 대통령님에 대한 기대를 이제 온전히 접었습니다. 2년이면 실망하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었습니다."
시사평론가 유시민이 동아일보 1999년 12월6일자에 쓴 '김대중 대통령님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유시민은 '동교동계 참모의 전진 배치'를 대단히 심각하게 문제 삼으면서 "나름의 뚜렷한 소신과 역량을 가진 정치인들이 국민회의에 많이 있는데도 대통령님께서 '예스 맨'만을 중용한다는 비판이 들리지 않는지요"라고 물었다. 유시민은 또다른 칼럼에선 '자기성찰 없는 비판은 위선'이라고 했다.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그랬던 유시민이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180도로 바뀌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정치적 경호실장' 노릇을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며 참모들의 '충성 경쟁'에 불을 붙였다. 노무현계 참모의 전진 배치는 물론 그 이상 가는 인사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냈고, 이젠 장관이 되어 자신이 직접 그런 일에 앞장서고 있다.
왜 이렇게 달라진 걸까? 지식인이 정치에 입문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지만, '싫은 소리'와 '자기 성찰'을 소중히 하면서 '독선'을 경계하는 건 정치인에게도 필수 덕목이 아닌가.
김대중은 악(惡)에 가깝고 노무현은 선(善)에 가깝기 때문인가? 동교동계는 불의(不義)에 가깝고 노무현계는 정의(正義)에 가깝기 때문인가? 유시민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참여' 또는 '지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시민은 대선 직전 '김대중 당선 불가론'과 함께 '조순 대안론'을 주장하는 책까지 쓸 정도로 김대중 정권과는 무관했다. 반면 노무현 정권엔 '창업 공신'이었다. 그는 노무현의 경제 가정교사이자 노무현을 위기에서 구한 1등공신이었으며, 노무현의 실세 386 참모들로부터 '시민이 형'이라 불리며 존경을 누린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은 유시민이 편하게 살지 않고 계속 '아웃사이더' 행태를 보인다는 이유로 그에게 열광했지만, 노 정권은 '유시민 정권'이기도 했다. 이게 유시민이 180도로 바뀐 최대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비단 유시민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왜 우리는 '남의 문제'에 대해선 고언과 성찰의 중요성을 역설하다가도 '내 문제'에 대해선 자기도취에 빠지는가? 왜 '남의 것'에 대해선 총명하고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다가도 '내 것'에 대해선 독선과 아집으로 일관하는가?
또 하나의 의문은 유시민의 무조건적인 노무현 옹호는 노무현을 끔찍하게 생각한 것 같지만, 실은 노무현을 폄하하고 무시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의 노무현 옹호는 노무현은 절대 바뀔 수 없으며 외롭고 취약하다는 전제에 근거했다. 그래서 자신이 노무현을 끝까지 돌봐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유시민의 그런 생각과 실천이 노무현의 잠재력을 훼손하고 지금과 같은 10%대 지지율을 불러온 근본 이유는 아닐까?
이 세상을 온통 썩은 수구 기득권 세력이 점령한 걸로 간주하고 자신들만이 깨끗하기 때문에 '코드주의'가 필요하다고 믿는 피해의식과 독선이야말로 유시민이 대표한 노 정권의 정체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의 좌절'을 추궁했던 유시민은 이제 노 정권의 탄생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에 대해선 무어라 답할 것인가?
● 정권 파탄 부른 독선과 아집
노 정권은 보수언론 탓으로 넘기려 들지만, 그게 아니다. 노 정권의 치명적 과오는 무능과 더불어 노 정권의 탄생을 지지한 사람들마저 '코드주의'로 배제하고 모욕한 기만에 있다. 그 기만은 웅대한 비전을 위한 '창조적 기만'이었을까? 그러나 기만은 오래가지 못하거니와, 비전과 탐욕의 경계는 불명확하다는 데에 노 정권의 비극이 있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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