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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7> 무수한 침묵의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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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7> 무수한 침묵의 소리들

입력
2006.09.0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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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대화할 때 누구나 깨닫는 점 하나는 대화 상대자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전화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사뭇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전화의 음감이 마주보고 하는 말의 음감보다 덜 또렷해서만은 아니다. 전화로 대화하기가 마주보고 대화하기보다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오로지 좁은 의미의 언어, 곧 소리연쇄로서의 음성언어만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들이 의사를 소통할 때 오직 음성언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대화할 때 표정이나 몸짓 같은 신체언어(보디랭귀지)로 음성언어를 보완한다. 전화로 얘기할 때 더러 상대방의 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되묻게 되는 것은 그 대화에 신체언어가 끼여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소리연쇄로 이뤄진 전형적 언어가 생겨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성언어가 생겨나기 전엔 인류가 신체언어를 사용했으리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신체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선 보조적으로 사용되지만, 동물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제스처를 의미소로 삼은 이런 신체언어를 더 느슨하게는 사인언어(기호언어: sign language)라고도 부른다. 인류는 음성언어를 만들어내기 전에 이런 사인언어를 주고받았을 테고, 음성언어를 만들어낸 뒤에도 서로 말이 다른 부족들끼리는 이런 사인언어로 의사를 소통했을 테다. 현대인들도 외국어로 얘기할 때는 모국어로 얘기할 때보다 제스처를 더 많이 쓰게 된다. 아무래도 외국어로는 제 의사를 즉각적이고 고스란하게 표현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 바깥의 언어라는 뜻에서 신체언어를 침묵의 언어(사일런트 랭귀지)라고도 한다. 흔히 ‘무언극’이나 ‘묵극’(黙劇)이라 번역되는 팬터마임은 침묵의 언어만으로 이뤄지는 연극 형식이다. 이런 침묵의 언어 또는 신체언어를 연구하는 분과학문이 키니식스(kinesicsㆍ어원적으로 ‘움직임에 관한 학문’의 뜻)다. 1950년대에 키니식스라는 말을 고안해낸 이는 무용가 출신의 인류학자 레이 버드위스텔이다.

버드위스텔에 따르면 사람의 몸짓들은 죄다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우연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 몸짓들로 이뤄지는 언어는 소리연쇄로 이뤄진 자연언어에 견줄 만한 문법구조를 지니고 있다. 음성언어의 최소단위인 ‘포님’(음소)이나 ‘모핌’(형태소)에 해당하는 것이 신체언어에서는 ‘키님’(운동소)이다. 신체언어의 의미는 이 키님의 연산을 통해 생산된다는 것이 버드위스텔의 생각이었다. 마거릿 미드나 그레고리 베잇슨 같은 인류학자들도 이내 키니식스 연구에 손을 뻗쳤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키니식스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의사 소통에서 음성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압도적으로 음성언어 바깥에서 교환된다. 갖가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대화를 꼼꼼히 관찰한 끝에, 버드위스텔은 의사 소통에서 어휘가 감당하는 비중이 30%에서 35%를 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은 이 비중을 더욱 끌어내렸다. 그는 ‘침묵의 메시지’(1971)라는 책에서 ‘7-38-55 법칙’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메라비언에 따르면 대면(對面ㆍface-to-face) 커뮤니케이션은 어휘, 목소리 톤, 신체언어 세 요소로 이뤄진다. 그리고 이 세 요소가 메시지 의미를 실어 나르는 데 감당하는 비중이 각각 7%, 38%, 55%다.

효과적이고 의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 세 요소가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세 요소의 메시지가 조화로워야 한다. 그러나 실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 세 요소가 부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의 요소들이 부조화를 이룰 때, 수신자는 발신자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가중치를 반영한 의미 연산을 시도한다.

메라비언이 든 예 하나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상대방에게 “난 너랑 아무 문제가 없어”라고 말했다 치자. 그런데 그는 상대방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고, 표정은 뿌루퉁하며, 목소리는 위축돼 있다. 언어요소(어휘)와 비언어요소(목소리 톤과 신체언어)가 서로 반대되는 메시지를 실어 나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 수신자는 언어요소(7%)와 비언어요소(38% + 55%)의 벡터를 합산해 발신자가 자신에게 부정적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메라비언이 제시한 수치가 적절히 산출됐는지에 대해선 말들이 많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 비언어 요소가 언어 요소를 압도하고 있다는 데에 인지심리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메라비언의 신체언어는 꼭 제스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외모나 복장 같은 시각 요소 일반이 포함된다. 그러나 메라비언이 염두에 둔 시각요소는 이른바 시각언어(visual language)와 고스란히 포개지지 않는다.

제스처도 크게 보아 시각언어의 일종이랄 수 있지만, 좁은 의미의 시각언어는 사진이나 동영상, 조형예술, 픽토그램이나 로고타이프처럼 세계를 인체 바깥에서 시각적으로 재현한 형태를 일컫는 것이 예사다. (물론 4년 주기로 한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보디페인팅은 좁은 의미의 시각언어와 메라비언의 신체언어를 겸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문자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각언어의 일종이지만, 일반적으로 문자를 시각언어라 부르지는 않는다.

신체언어 가운데 어떤 것은 인류 보편적이고, 어떤 것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기쁨, 슬픔, 화남,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는 표정언어는 인류에게 대체로 공통적인 듯하다. 그것들이 문화 못지않게 생물학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무릎을 꿇는 것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굴복을 의미한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것이 긍정을 뜻하고 좌우로 흔드는 것이 부정을 뜻하는 것도, 그 반대의 예가 보고되기는 했으나, 거의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어깨를 으쓱거림으로써 무관심이나 경멸을 드러내는 것은 일부 서양 문화권에 국한돼 있다. 가장 적나라한 욕설의 메시지를 담은 손가락언어도 한국의 경우와 서양의 경우가 다르다.

문화권에 따라 신체언어가 다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체언어는 음성언어에 견주어 한결 통(通/統)-문화적이다. 신체언어의 적잖은 부분은 그것을 굳이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것은 신체언어의 본원적 보편성에 기인할 것일 수도 있고, 문화접촉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으며 자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수신자가 발신자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공감하며 듣고 있음을 뜻한다. 머리를 긁적이는 것은 수줍음이나 난처함, 자책을 의미하고, 턱을 듦으로써 뭔가를 지시하는 것은 수신자에 대한 발신자의 우위를 드러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는 것은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은 ‘최고’라는 것을 뜻한다.

신체언어는 음성언어만큼 정교할 수 없다. 신체언어의 형태소들이 음성언어에서만큼 다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일반의 표현적 기능에서 신체언어는 음성언어에 뒤지지 않는다. 감정을 가장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어휘가 아니라 몸이다.

▲ 수화(手話)와 구화(口話)

몸 부위따라 의미 나눠… 수화에도 문법이

수화는 청각장애인(농아인)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체계적으로 고안된 신체언어다. 비장애인들의 신체언어처럼 수화도 몸짓과 표정, 손가락을 사용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수화는 일반적 신체언어와 달리 음성언어의 보완물이 아니라 대체물이 돼야 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인 신부 샤를 미셸 드 레페(1712~1789)가 창안한 수화는 그 뒤 각 자연언어의 문법에 맞춰 손질되며 농아인 교육의 새 장을 열었다.

수화에도 음성언어에서처럼 체계적인 의미장이 존재한다. 가장 간단한 것은 사용하는 몸 부위에 따라 메시지의 의미를 계열화한 것이다. 예컨대 한국어 수화의 경우에, 머리 부위의 수화 기호는 대체로 지적(知的) 정신적 활동을 지칭하고, 코 부위 수화 기호는 가치 평가와 관련 있다.

목 부위 수화 기호는 경험이나 욕망과 관련 있고, 어깨 부위 수화 기호는 의무나 책임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또 위팔은 힘이나 권세와, 아래팔은 노동과 관련돼 있다. 몸짓의 방향이나 양태에 따라서도 상징적 의미가 한결 섬세하게 계열화해 있다. 그러니까 수화에도 문법이 존재하는 셈이다. (수화의 의미적 계열화에 대한 설명은 ‘수화사랑-손짓사랑’ 사이트 http://myhome.naver.com/minirose/를 참조했다.)

농아인 교육에는 수화법(manual method)말고도 구화법(oral method)이 쓰인다. 구화법은 농아인이 상대의 입술 움직임을 읽어서 메시지를 이해하는 한편 소리내는 연습을 통해 음성언어를 제한적으로나마 익히게 하는 교육법이다. 독순법(lip reading)이라고도 한다. 구화법은 드 레페 신부와 동시대인이었던 독일인 교육자 자무엘 하이니케(1727~1790)가 제창했다.

하이니케가 구화법을 제창한 것은 드 레페의 수화법이 청각장애인의 커뮤니케이션을 장애인들 사이로 한정하기 십상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사실 수화법의 틀 안에서는, 비장애인이 수화를 배우지 않는 한,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이뤄질 수 없다. 반면에 구화법은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한편 구화법은, 수화법과 달리,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연히 비대칭적이다. 구화법은 비장聆括?기준으로 삼은 청각장애인 교육법이고, 그래서 수화법에 견주어 청각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수화법과 구화법 가운데 어느 쪽이 농아인 교육에 더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으나, 구화법이 주류화하고 있는 추세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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