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남편은 아침에 나가면 일러야 새벽 2~3시 그렇지 않으면 밤을 새우고 들어옵니다. 옷은 사흘돌이로 갈아입혀 보내지만, 언제나 까무잡잡하게 검어지는구려.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물으면, 온종일 마작구락부에 있었답니다. 대체 어찌해야 좋습니까?"
1937년 2월, 일간지 독자상담코너를 두드린 '원남동 주부'에게 상담자는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정말 딱한 일입니다. 마작구락부에 모인 마작당(黨)들은 밥도 굶습니다. 청요리나 빵조각을 물고 온종일 한자리에 앉아서 버팁니다.
마작에 반한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패를 들고 앉으면 세상일이 모두 뜬구름 같고, 세월이 가는 줄 모르며, 뼈속까지 짜릿하게 재미가 난다고 합니다. 바깥양반은 아마도 웬만한 충고를 해서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가만히 두고 보다가 한번 크게 혼을 낼 계책을 생각하십시오. 밤늦도록 놀다가 돌아와 곤히 잘 때, 옷을 전부 치워버리고 벌거숭이로 만들어놓은 다음, 뭐라고 말하더라도 듣지 말고, 밥만 먹이며 사나흘 동안 가둬두시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일 듯합니다."
1930년 12월, 조선총독부는 경성에 30여개소의 마작구락부를 허가했다. '문화도시' 경성에 공인된 도박장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드세게 일었지만, 마작은 '게임'이지 도박이 아니라는 총독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게임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총독부의 의지 덕분에 마작구락부는 전 조선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6개월 만에 경성의 마작구락부는 50여개소로 늘었고, 허가를 기다리는 업소도 100여개소에 이르렀다.
1년 후, 인구 30만인 도시 경성의 마작 인구는 3만여명, 매일같이 마작으로 밤을 새우는 중독자도 3,000여명에 달했다. 대공황 직후, 유사 이래 최악의 불황에 시달리던 조선에서 유독 마작구락부만 호황을 구가했다.
폐해는 막대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마작 패를 속였다고 주먹다짐을 하고, 마작으로 학비를 탕진한 학생은 좀도둑으로 전락했다. 귀족, 교장, 학사, 교회간부, 회사중역은 도박 혐의로 줄줄이 체포되었다. "마작은 하되, 마작으로 도박은 하지 마라!"는 총독부의 명령을 어긴 탓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마작 열풍의 진짜 원인은 총독부의 게임산업 육성 정책이 아니었다. 젊은 마작 중독자는 마작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작 상에 대하고 앉았으면 만사를 잊어버린다. 그야말로 무아의 경지요, 초현실의 세계다.
아편이 사업에 실패한 사람,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 실연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마작이 더 나을 줄 안다. 욕 먹을 말일지 모르나, 나는 이렇게 권고하고 싶다. 젊은 사람으로서 특히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살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은 얼마동안 마작을 하라고. 그래도 못 잊는다면 그때는 아편이 좋겠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을 받아줄 사람이 없고, 나라꼴도 엉망이고…. 아편이든 마작이든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 '삶과 문화' 필진이 바뀝니다. 김명화(40ㆍ극작가), 김선욱(46ㆍ숭실대 철학과 교수), 남진우(46ㆍ시인), 이종선(41ㆍ이미지디자인컨설팅 대표), 전봉관(35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황성호(51ㆍ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 교수ㆍ이상 가나다 순)씨가 집필합니다. 6개월 동안 수고해주신 이전 필진께 감사드리며 새 필진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합니다.
전봉관ㆍ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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