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향해 노골적으로 마수를 뻗치던 1906년, 난세(亂世)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지금의 재정경제부 장관) 석현(石峴) 이용익 선생의 머리 속에는 한 문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바로 ‘興學校以扶國家(흥학교이부국가ㆍ학교를 일으켜 나라를 버틴다)였다.
석현이 ‘나라를 버티기’ 위해 세운 보성고가 5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개교 당시 서울 박동(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터)에서 246명의 신입생을 뽑아 1회 졸업생 75명을 배출했다. 이후 100년이란 시간이 쌓이면서 각계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3만7,000명의 ‘보성인’을 낳았다.
보성고는 이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섰을 때나 역사의 고비 때마다 크나큰 역할을 해 냈다. 1919년 당시 천도교 측에서 재정난에 빠진 학교를 잠시 맡았을 때, 교주 손병희와 최 린 교장은 민족대표 33인으로 나서 3ㆍ1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3만5,000장을 찍어낸 곳도 학교내 인쇄소였던 보성사였다.
1940년대엔 간송 전형필 선생이 학교를 인수, 현재 학교법인인 동성학원을 설립했다. 당시 일제는 문화말살 정책을 벌이며 우리나라의 유산을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혈안이었다. 민족문화재 수집가였던 간송은 이에 맞서 문화유산의 유출을 막는 등 문화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 역시 사회 각계에 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특히 일제 시대 필력을 날린 문인들은 죄다 ‘보성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닐 정도로 문학에서는 거의 독보적이었다.
현진건과 염상섭, 그리고 이상은 일제 치하 보성학교를 다니며 습작을 썼고 후에 각각 ‘빈처’ ‘표본실의 청개구리’ ‘날개’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해방 후에도 보성은 조정래와 조세희라는 대작가를 낳아 ‘문예 보성’이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입증했다.
문인 외에도 보성을 빛낸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정ㆍ관계에선 변영태(1회) 전 국무총리 유진산(15회) 전 신민당 당수가 보성고 출신이다. 재계에는 정세영(39회)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몽헌(58회) 전 현대그룹 회장 허동수 GS칼텍스(50회) 등이 있다. 동문 언론인으로는 이상협(1회) 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 류근일(46회) 전 조선일보 주필, 임철순(60회) 한국일보 주필 등이 눈에 띈다.
보성고는 개교 100주년을 하루 앞둔 4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방이동 교내 운동장에서 재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동문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주탁 삼영산업 회장, 유희춘 한일이화 회장, 송영수 전 한진중공업 사장, 박노빈 삼성에버랜드 회장, 권영걸 서울대 미대 학장, 박계동 한나라당 의원 등 각계 동문들이 참석했다. 전성우(72) 재단이사장은 기념식사를 통해 “새로운 100년의 역사도 창조적으로 설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보성고는 9일 서울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동문 재학생 학부모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음악회를 열어 100주년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박원기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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