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밑바닥을 떠돌 때조차 팬 여러분의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줬습니다."
4일(한국시간) 미국 뉴욕의 빌리진킹 내셔널테니스센터 아서애시코트. 스탠드를 가득 메운 2만여 명의 관중은 기립박수로 떠나가는 영웅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앤드리 애거시(36)의 뺨에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때 '테니스 여제'로 군림했던 아내 슈테피 그라프와 두 아이도 관중석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감격에 겨워 스탠드를 둘러보던 애거시는 천천히 코트로 걸어나와 눈물을 훔쳐내며 자신의 '전매특허'인 양손 키스 세리머니로 화답했다. 그렇게 코트에서 또 하나의 별이 졌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의 테니스 스타, 치렁치렁한 헤어스타일로 여성팬들을 사로잡고 비록 짧았지만 영화배우 브룩 실즈와의 결혼생활로 남성팬들을 질투나게 했던 '섹시 가이' 애거시가 정든 코트를 떠났다. 1990년대 그와 테니스계를 양분했던 피트 샘프라스가 2002년 US오픈 정상에 오르며 코트를 떠난 것처럼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의미있는 은퇴다.
호주오픈(95, 2000, 2001, 2003년), 프랑스오픈(99년), 윔블던(92년), US오픈(94, 99년) 등 개인 통산 8차례 메이저대회 우승을 포함해 투어 단식 60회 우승에 빛나는 백전노장 애거시. 그러나 그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애거시는 이날 열린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US오픈 남자 단식 3회전에서 독일의 베냐민 베커(세계랭킹 112위)에게 1-3(5-7, 7-6, 4-6, 5-7)으로 패한 뒤 올 시즌 초 공언한대로 21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쉽지 않은 은퇴 무대였다. 대회 직전 고질적인 허리와 등의 통증이 도져 1회전부터 진통제를 맞고서야 코트에 나설 수 있었다. 2회전에서는 올 호주오픈 준우승자인 마르코스 바그다티스(8위ㆍ사이프러스)와 맞서 투혼으로 제쳤지만 더 이상의 운은 따르지 않았다. 이날 세트 스코어 1-2로 뒤진 4세트, 5-4로 앞서던 그는 반전을 노렸지만 막판 힘이 달렸다. 애거시의 트레이너인 길 레예스는 "허리 통증이 심한 걸 알기에 그를 코트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애거시의 투혼을 높이 평가했다.
경기 후 마이크를 잡은 애거시는 "코트의 스코어보드는 오늘 내가 졌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지난 21년간 내가 얻었던 것을 모두 알려주지는 않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팬 여러분의 사랑이 코트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나를 이끌어줬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는 또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그날의 컨디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 느낌도 괜찮을 것 같다"면서 새로운 인생에 대해 기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애거시는 92년 윔블던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사상 5번째로 '커리어 그랜드슬램'(4대 메이저대회를 시기에 상관없이 모두 우승하는 것)을 달성했다. 시야가 넓고 상대의 서브에 반 박자 빨리 움직여 '리턴의 황제'라는 별명이 알려주듯 손꼽히는 테크니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97년 랭킹이 142위로 추락하는 등 깊은 슬럼프에 빠졌던 그는 99년 다시 프랑스오픈 정상에 오르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펼쳤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오미현기자 mhoh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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