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이었다. 산사태로 잃은 가족의 시신을 찾아 폐허가 된 강변을 뒤지고 있는 수재민의 등 뒤에서 방송기자는 안타까운 정황을 전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넋을 잃고 수마가 쓸고 간 집터를 쳐다보고 있는가 하면, 가족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며칠째 땡볕더위 속을 뒤지던 실종자 가족이 지친 몸으로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 국민을 내려다보는 정치
아니. 수재민이 어느새 땅굴이라도 파고 집터 밑으로 들어가서 두더지처럼 땅 속에서 집이 있던 자리를 올려다보고 있단 말인가. 가족을 잃은 저분이 땅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땅바닥을 쳐다보는가.
쳐다보는 것은 얼굴을 들고 올려다보는 행위이다. 위를 향하여 올려다보거나, 얼굴을 들어 바로 보거나, 존경하고 부러워하면서 우러러 볼 때 쓰이는 표현이다.
갑작스런 재해를 만나 집과 농토와 가족을 잃은 수재민이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산사태로 굴러내려온 돌덩어리로 엉망이 된 땅바닥을 쳐다볼 수가 없고, 자취도 없이 쓸려나간 집터를 쳐다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므로 현장의 기자나 리포터는 수재민들이 땅바닥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보거나 살펴보거나 바라보고 있다고 표현했어야 옳았다.
말의 오용이 우리 사회에 넘친다. 쳐다보는 것과 내려다보는 것이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쓰이다 보니, 우리의 삶까지 그 모양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국민을 어렵게 알고 쳐다보아야 할 정치가 국민을 뭐로 알고 깔보고 내려다본다.
"배 째드리지요" 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경악을 잊지 못한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는가 싶었다. 권력의 구중심처에서 도살장에서도 쓰임직하지 않는 말들이 오갔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무슨 홍보관계자의 말이었다니. 배를 째드리겠다는 말을 했든 안 했든, 말이 이 지경에 이르면 남는 것은 절망감밖에 없다. 권력의 깊은 곳에서 그런 말이 꿈틀댈 수 있는 개연성에 절망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시장에서도 쓰기가 조심스러운 말들을 정치권이 '공식적인 입'을 통해 쏟아내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랬던 것들이 이제는 거의 흉폭(凶暴)한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근저에는 국민을 얕잡아 보는, 국민을 별 볼일 없이 아는, 국민을 쳐다볼 줄 모르는 권력에 도사린 오만이 보이는 것이다. 이것 또한 국민을 내려다보면서도 말은 쳐다본다고 하는 '쳐다보다'의 오용이다.
특히 방송 드라마에서의 경우는 매일같이, 어머니와 함께 앉아 밥그릇을 쳐다보고(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라도 했나), 사랑하는 여자의 구두를 쳐다보고(몸을 엿가락처럼 구부리는 곡예사라도 되는가), 반가워서 달려드는 강아지를 쳐다본다(강아지를 쳐다보는 건 생쥐 밖에 없다). 왜 이런 잘못된 언어 사용이 방송에서 걸러지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집중호우라고 하는 말을 북한 방송은 '무더기 비'라고 표현한다. 같은 비라도 체제가 다르니 말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하면 다 말인가. 은사이신 황순원 선생님은 인인인인(人人人人)이라고 사람 인자 넷을 써놓고,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풀이해 주신 적이 있었다. 선생님의 말을 원용하자면 언언언언(言言言言)이 된다. 말이면 다 말인가. 말다워야 말이지.
● 正論은 正名에서 시작된다
정년을 맞아 대학을 떠나는 고별강연에서 정론(正論)은 정명(正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설파한 분은 언론학자 최정호 박사였다. 정명이 없이 정론이 설 수 없다. 말을 바로 쓰고 가려 쓰면서 다듬어 가는 일은, 말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론이 정명에서 시작되듯 그것은 우리의 삶을 바르게 다듬어서, 가려 사는 일이기도 하다.
한수산 소설가ㆍ세종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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