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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가상 인터뷰-대화] <27> 그랜트 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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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가상 인터뷰-대화] <27> 그랜트 우드

입력
2006.09.0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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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주 출신의 화가. 미국 중서부 시골의 풍경과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그는 미국 현대 회화사에서 지역주의(regionalism)에 속하는 화가인데, 지역주의란 도시 및 급격하게 발전하는 기술적 진보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던 추상주의 화풍에 대해 공격적으로 반대하면서, 시골 생활의 정경에 초점을 맞춰 작품 활동을 해나간 미국 미술운동 유파를 가리킨다.

지역주의 스타일은 1930년에서 1935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는데 우드와 벤튼 (Thomas Hart Benton)과 커리(John Steurt Curry)가 대표 작가다. 아이오와주 애너모서에서 출생한 그랜트 우드는 열살 때 아버지가 죽자 가족이 시더래피즈로 이사한다. 어려서는 시골의 금속 공예점에서 도제 생활을 했고 미네아폴리스의 미술학교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군대에서 위장물을 그리는 작업을 했고 제대 후에는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20년대에 네 번에 걸쳐 유럽 여행을 하면서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과 인상파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우기도 했고 1934년부터는 아이오와대학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대표작으로는 ‘개척자 터너’(1929),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했다는 ‘식물을 든 여인’(1929), ‘아메리칸 고딕’(1930) 등이 있다. 미국 회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의 하나인 ‘아메리칸 고딕’이 처음 전시되자마자 그는 이 작품 덕에 상을 타게 되었고, 미국의 신문들이 이 작품에 관한 기사를 전국적으로 내보냄으로써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작품 배경이 된 건물의 모델은 아이오와 남부의 작은 마을인 엘든이란 곳에서 그가 발견한 시골집인데, 그는 이 집에 아주 매혹되어 버렸다. 뾰족한 지붕 모양과 지붕 바로 아래의 창은 중세 유럽 고딕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며, 작품 제목은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델이 된 사람은 그의 치과 의사와 그의 여동생 낸(Nan)인데, 흔히 부부로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의 의도에서는 시골 농부와 그의 딸로 설정돼 있다.

이 작품의 시각적 특성은 딱딱할 정도로 정면에서 인물들을 묘사한 수법이라든가 매우 꼼꼼한 디테일의 처리 등으로 요약되는데, 일부 미술사가들은 그랜트 우드가 북유럽 르네상스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림에서만 아니라 그는 글을 통해서도 미국 중서부 시골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대해 강조했다.

‘아메리칸 고딕’에 묘사된, 미국 중서부 시골 문화 특유의 편협됨과 억압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이 대립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하나는 그랜트 우드가 이것들을 풍자적으로 그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반대로 도리어 이것들을 상찬하는 관점에서 그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메리칸 고딕’은 미국 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 역할을 하면서 계속해서 다양하게 패러디되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TV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시리즈 1의 타이틀시퀀스에 사용되었다.

이재현(이하 현) 우드 선생님, 안녕하세요. 뉴올리언즈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가 터진지 1년이 넘었고 또 며칠 지나면 9ㆍ11이 5주년을 맞게 되는지라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랜트 우드(이하 우드) 뉴올리언즈는 아직 복구가 다 안되었지. 복구된 곳은 시내 중심가와 백인들이 사는 지역뿐이라네. 너무 슬픈 이야기야. 근데, 9ㆍ11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현 그게 얘기가 길다면 긴데요. 부시의 집권이라는 게 미국 내셔널리즘의 대두라는 것을 빼놓고는 잘 설명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집권 이후 부시 정권의 군사, 외교전략은 완전히 실패한 거잖아요?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혼란만 가중시키는데 그친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 그리고 이라크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협박에 대해 전세계 사람들이 분노하고 규탄하고 있는데, 정작 미국 사람들 상당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구라’를 듣기보다는 선생님 그림을 보면서 얘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우드 난 2차대전도 끝나기 전에 죽어서 설명해 줄 게 별로 없어.

현 그럼, 미국 중부라든가 지역주의 미술 얘기부터 해주세요. 선생님 그림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우드 내가 살던 아이오와주는 대평원지대라고 부르는 지역에 속해 있어. 미국 지역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대표적인 것으로 미국 국세청의 분류가 있고 또 언어학자들의 분류가 있고 말이야…. 아무튼 미국의 지리적 심장부라고 해야 할 이 중부 대평원지대는 서쪽으로는 로키산맥 서부의 여러 주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5대호 주변의 여러 주들 사이에 끼여 있는 셈이지. 그리고 남쪽에는 남부의 몇 개주가 있어. 만약 미국의 역사, 문화적 뿌리를 백인 프로테스탄트 자작농에 둔다고 하면 대평원지대가 나름대로 미국적 정서를 대표한다고 할 만하지. 19세기초에 백인 이주민들이 미시시피강을 건너서 만나게 된 광막한 대초원이 바로 이 중부 대평원 지역이야.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돼.

현 1930년대 대공황시대에 지역주의가 대두했는데요, 선생님의 ‘개념’은 어떤 것이었죠?

우드 그건 아주 단순한 거야. 내 생각에 화가들은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거였어. 화가들 주변에 있는 거, 화가들이 잘 알고 있고 쭉 보고 있는 거를 그리자는 거였지.

현 중부 대평원지대에서 태어나고 자란 선생님의 경우에는 그 주장이 지역주의라는 걸로 귀결이 되겠지만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요?

우드 그 사람들 역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들을 그리면 되는 거지. 미국 현대 미술사에서 ‘미국적 정경’(American Scene)이라는 슬로건이 있다네. 대도시 사람들은 대도시의 정경을 그리면 되는 거야. 자네 호퍼(Edward Hopper)라고 들어 봤나? 크게 봐서, 나와 더불어 리얼리즘 유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친군데, 그는 대도시의 풍경과 인물들을 그렸어. 호퍼가 그린 그림에 작은 소도시나 시골의 풍경들도 있지만, 시골을 그릴 때에도 어디까지나 호퍼는 도시 특유의 적막함이랄까 외로움 따위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렸던 거야.

현 같은 지역주의 작가들 중에, 선생님의 친구분인 벤튼은 상대적으로 더 전국적인 분위기랄까 그런 것을 묘사했고, 커리는 1930년대 대공황시대의 일반적인 경제적 궁핍을 강조한 반면, 선생님은 더욱 더 중부 지방 특유의 시골다움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데요.

우드 그거야 작가들의 개성적 차이일 수 있는 거고, 나로서는 19세기적인 미국에 더 끌렸지. 내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의 옷차림새라든가 산업화한 풍경들이 거의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야. 그러다 보니, 관점에 따라서는 상대적으로 퇴행적으로 보일 수 있는 풍경이나 인물을 더 많이 그리게 된 거야.

현 선생님이 표현하신 세계가 어떤 점에서는 미국 문화의 풀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특히 아들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강력한 정치적 지지를 몰아주었던 미국 각 지역의 보수주의 기독교 세력의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 기반이 되는 세계가 바로 선생님의 그림에서 묘사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우드 메이비(maybe).

현 뭐라고 해야 할까요? 완고함, 아둔함, 편벽됨, 이런 것들을 선생님의 그림에서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만.

우드 ‘아메리칸 고딕’에 그런 게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현 대공황 때도 그랬고 9ㆍ11 이후에도 그런 건데요, 미국은 어려울 때면, 내셔널리즘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듯합니다. 그게 내적으로는 지역주의로 나타나는가 하면, 외적으로는 고립주의로 나타나구요. 그런데, 이 고립주의라는 게 의외로 군사적으로는 매우 공격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게 바로 현재 미국의 외교군사 전략인데요.

우드 자네가 하려는 말이 도대체 뭔가?

현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 그래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든 지 50-60년이 채 되지 않은 나라의 내셔널리즘과 비교해 볼 때, 미국과 같은 ‘제국’의 내셔널리즘이라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거지요.

우드 제3세계에 속했던 나라라고 해서 내셔널리즘이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닐세.

현 그야 그렇습니다만, 어쨌든 상대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는 거죠. 또 더 큰 문제는 미국 중서부의 백인 ‘보통 사람’들, 혹은 뉴올리언즈의 집 잃은 흑인들이 내적으로는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소위 자유 국가 미국, 위대한 나라 미국, 신이 축복해 주신 나라 미국에 흡수, 통합되어 있다는 거죠, 바보같이요.

우드 메이비. 그런데 자네가 살고 있는 남한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가? 가만 있자, 그러니까, 남한이 베트남 옆에 있는 거 맞지?

현 옛?(벌러덩)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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