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대학장)는 외환 위기 이후 재벌 개혁의 파수꾼이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재벌 저승사자란 악명(?)을 듣기도 했다. 장 교수는 삼성전자, SK텔레콤 주주총회에 수년간 나타나 경영진을 상대로 지배구조 개선과 소액주주 보호운동을 벌인 투사였다.
장 교수가 이끌었던 참여연대는 그동안 삼성, 구 현대, LG, SK를 대상으로 편법 상속 및 증여 의혹, 펀드 부실화 및 계열사 부당지원에 따른 이사진의 부실경영 책임론을 제기하고, 소송을 주도했다. 참여연대는 이제 재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재벌 감시꾼' 장 교수가 최근 자신이 설립한 '장하성펀드'를 통해 대한화섬 주식 5%를 취득하면서 시장참여자로 변신,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투자고문으로 있는 장하성펀드(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는 아일랜드에 적을 두고 있으며, 주주도 외국인으로 구성돼 있다. 이 펀드는 대한화섬 주식 매입을 계기로 은둔경영으로 유명한 태광산업그룹의 지배구조를 고치겠다며 다부진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링 밖에서 재벌 훈수만 두던 장 교수가 링 안으로 들어와 지배구조도 개선하고, 돈도 벌겠다고 나선 것이다. 현직 대학 교수겸 시민운동가가 조세피난처에 적을 둔 역외펀드에 투자 자문을 해주고 보수를 받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하느냐는 논란도 적지않다.
장 교수는 심지어 '월스트리트 앞잡이'란 지적에 대해 "돈버는 게 무슨 죄악"이냐고 항변했다. 투자자문으로 얻은 수익금은 전액 공익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개인적 치부보다는 대의명분에 충실하려는 교수의 '충정'이 엿보인다.
하지만 장하성펀드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이 펀드는 본질적으로 주주가 불분명한 외국계 사모펀드이기 때문이다. 역외펀드는 저평가된 가치주를 사냥해 차액을 남긴 후 떠나는 것이 속성이다. 지배구조 개선 명분은 포장에 불과하다. 본질은 머니게임이다. 돈에는 천사(天使)표가 붙어있지 않다. 역외펀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SK㈜와 KT&G를 공격했던 소버린과 칼 아이칸도 지배구조 개선을 내걸었지만, 주가를 올려 수천억원씩의 차익을 남기고 떠났다. 역외펀드의 '먹튀'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다. 장하성펀드는 장기 투자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제2의 소버린에 불과하다는 우려를 해소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장하성펀드는 차라리 오너가 적은 지분으로 황제경영을 하고, 계열사간 몰아주기식 내부거래가 많은 재벌을 타깃으로 했다면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한화섬은 대주주가 70%의 지분을 갖고 있어 장하성펀드가 지배구조를 개선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국민연금등과 연계, 지배구조가 좋은 기업에 대해 집중 투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재벌개혁을 주도했던 장교수의 명성과 국민적인 존경심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장교수가 '독이 든 사과'(역외펀드에 이용당하는 것)를 쥐었는지는 펀드 운용을 통해 평가받을 것이다. 그의 구상대로 3년안에 국민들이 참여하는 공모펀드가 성공을 거둔다면, 장하성펀드는 순항하게 될 것이다.
이의춘 산업부장 직대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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