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의 시’라고 불러도 좋겠다. 고통과 회한, 고독과 슬픔이 그득한데, 온도계를 갖다 대면 눈금은 언제나 체온을 웃돈다. 그것은 고국을 떠난 이방인의 격절감, 날마다 죽음을 보는 자의 고통과 공포마저 따뜻한 서정의 품 안으로 보듬는 시인의 타고난 성정 때문일 것이다. 이미 마른 나뭇가지를 흔드는 삭풍을 보고도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방문객’)고 노래한 시인이지 않은가.
마종기(67) 시인이 열한 번째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문학과지성, 6,000원)를 펴냈다.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이후 4년 만에 묶어낸 시집이다.
40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죽어가는 환자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울던 날들”(‘화가 파울 클레의 마지막 몇 해’)을 모국어로 견뎌온 이 의사 시인은 총 54편의 시를 담은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고향과 죽음과 외로움을 노래하며 “한 줌의 온기로 한겨울을 견뎌내는 이의 간절함”(권혁웅 해설 ‘너무 먼 이쪽’)을 보여준다. 하지만 쉽고 담박한 언어 속에 빼곡히 담아넣은 핍진성은 어떤 화려한 수사보다도 아름답게, 읽는 이의 내면을 다시 한 번 뒤흔든다.
5~7년씩 걸리던 시의 배태기간이 4년으로 짧아진 이유를 “의사 생활에서 은퇴한 후 내 게으름을 은폐하고 싶었던 무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설명하는 시인은 시집의 많은 부분을 시를 신봉하는 사도의 자세를 정갈히 가다듬는 데 할애했다. “매일 맥주나 마시며 슬프다고 쓰러지는 서울의 문학은/주술의 쓰레기나 다름없다고 수박 껍질을 던지며/선생도 시를 쓰겠거든 땀 흘려 손과 발로 고백하란다”(‘캄보디아 저녁 2’)는 젊은 후배 시인의 말을 빌 때, “용기 있는 시만이/자신을 뚫고 넘어서/여전히 소소하게/포옹의 길을 찾아 떠난다”(‘시인의 물’)고 다짐할 때, 독자는 시를 향한 이 노시인의 신앙의 무게를 저절로 가늠케 된다.
평론가 김주연은 마종기의 시를 두고 ‘사랑의 냄새가 나는 시’라고 했지만, 이번 시집에서 또 한 편 두드러지는 것은 상처의 냄새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다/솔잎내 유독 강한 나무를 찾으니/둥치에 깊은 상처를 가진 나무였네./속내를 내보이는 소나무에서만/싱싱한 육신의 진정을 볼 수 있었네.//…나도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몸 가리고 태연한 척 살았었네./소나무가 그 냄새만으로 우리에게 오듯/나도 낯선 피를 흘리고 나서야/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네./우리들의 두려움이 숲으로 돌아가네.//”(‘상처 4’) 상처 받은 사람은 같은 부위를 다친 사람을 귀신 같이 알아본다.
항생제는, 살충제는 “사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상처 5’)이라는 엄연한 진실을 수긍하는 것뿐이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아프지, 그게 오래 서로 부르고 있다는 증거야.”(‘상처 6’)
시집 발간에 맞춰 시인은 석 달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니 어쩌면 행복하게도, 이 시인의 ‘귀향’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돌이키고 싶으나 돌이킬 수 없는, 귀환을 열망하지만 결코 귀환하지 않는 탕자의 강인함”(권혁웅)이 너무 멀리, 너무 오래 흘러온 그의 시 세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으니 말이다(‘귀향’).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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