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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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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입력
2006.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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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지음 / 가파랑 발행·1만2,000원

당신이 저 비싼 옷을 욕망하는 것은 옷이 탐나서가 아니라 그것을 입은 당신을 선망하거나 질투할 타자의 시선을 욕망하는 것이다. 당신의 욕망마저 당신 것이 아니라는 이 차가운 선고가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다.

하지만 욕망의 노예인 우리 호모사피엔스들은, 슬기의 인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게도, 이 타자화한 욕망의 사슬, ‘소비조작 사회’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끊임없이 욕망하게 하면서 그 욕망으로 하여금 우리를 소외시키도록 배후 조종하는 이 잔인한 소비지상의 시간 위의 부유하는 마루타들. 그들(우리)에게 소비는 실존의 다른 이름이다.

상명대 불어교육과 박정자 교수는 새 책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에서 현생 인류를 ‘호모 콘소마투스’(Homo Consomatusㆍ소비 인간)라 부른다. 책은 호모 콘소마투스의 소비 풍경, 실존의 풍경을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을 통해 파헤친다.

그가 말하는 ‘소비’는,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소비가 아닌, 사치나 낭비 등 잉여소비이다. 그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책 제목이 의미하듯, 잉여소비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이고 그 욕구로 하여 문화가 태동했다는 입장에 저자는 동조한다. 그는 바타이유의 ‘낭비의 개념’을 인용하며 “문학이나 예술 등 모든 문화는 절약과 생산이라는 경제학적 체계를 벗어나는 비합리의 부분, 낭비의 부분”이라고 적고 있다.

또 낭비는 배풂의 형태로 정서적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 시혜자와 수혜자 간의 권력관계를 규정함으로써 정치 경제의 메커니즘을 지탱한다. 따라서 소비는 현대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기본 원리이자, 사회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핵심 ‘코드’인 것이다.

이 잉여소비의 시대는, 마르크스의 시대가 ‘생산’을 사회화했듯이, ‘소비’를 사회화한다. 이제 인간은 소비를 통해서만 사회에 통합된다. 노숙자나 독거노인이 우리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것은 그들이 (생산활동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소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밀히 또 노골적으로 소비가 학습되고 통제되는, 그래서 “소비하지 않으면 반사회적 존재가 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두에서 보았듯이, 타자와의 구별 짓기(distinction)를 향한 욕망에 조종당하고 있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와 동일시하고 못한 존재와 차별화하려는 욕망. 이 때 소비의 대상, 욕망의 대상은 동일시와 차별화의 ‘기호’일 뿐, 그 제품 자체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소비 평등사회로 열심히 내닫고 있다. 탤런트가 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이 불티나게 팔리는 시대에 그 핸드백은 더 이상 차별화 기호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이제 남아있는 유력한 차별화의 기호는, 부르디외가 저서 ‘구별짓기’에서 밝혔듯, 돈으로 단시일 내에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지식이나 교양 등 ‘문화자본’이다.

그리고, 심지어 노동마저 나를 남과 차별화하는 위세상품이 된다. 상류층 대부분이 유한(有閑)계급이었던 베블렌의 시대와 달리, 이 시대의 상류층은 비행기로 지구촌을 누비며 하루 15시간씩 노동하는 무한계급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바라본 소비사회의 풍경이자, 소비의 코드로 세상을 고찰한 사유의 풍경이다. 소비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고찰한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베블렌의 ‘유한계급론’, 갤브레이스의 ‘풍요로운 사회’, 현대의 소비행태를 기호로 고찰한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과 그의 후배격인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그리고 부르디외, 롤랑 바르트, 르네 지라르…. 저자는 이들의 난해한 이론적 개념들을 시사적인 사례를 곁들여 설명한다.

이 깨달음은, 탈옥의 희망 없는 수인에게 갇혀있음을 인식시키는 일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나’의 욕망을 응시하며, 그것의 노예인 나를 냉소할 수 있다면, 적어도 멋모르고 으스대는 어릿광대짓만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호모 콘소마투스의 슬픈 실존이여.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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