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여성 아나운서들의 '튀는' 행보가 화제가 되면서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이 한창이다. 초점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 현상에 맞춰져 있지만, 그 안에는 방송환경의 급변으로 아나운서만의 전문성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아나운서를 꿈꾸는 지망생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그 속사정을 들여다본다.
최근 이정민(MBC) 김지연(SBS) 김경란(SBS)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아레나’ 화보 촬영이 화제에 올랐다. 단정한 이미지의 지상파 방송사 아나운서들이 ‘섹시’ 화보를 찍은 것도 파격적이지만, 일부는 대외 활동 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방송사 내규를 어겨 더욱 논란이 됐다. 노현정, 강수정 KBS 아나운서가 지난해 공익광고에 출연하면서 규정 이상의 사례비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논란이 충분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아나운서들이 이 같은 파격 행보를 감행한 데는 깊은 위기 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벌가 며느리가 된 노현정 아나운서와 그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의 후임자 선정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이 보여주듯, 요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 달리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KBS는 노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뉴스광장’의 후임 앵커를 선발하면서 아나운서를 배제하고 ‘5년차 이상 여기자’만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다. 뉴스제작팀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여기자들의 자원도 풍부하고 뉴스 전달력이나 외모도 아나운서 못지않다는 보도국 내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나운서는 취재 경험이 없어 비상시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일부는 원고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서 “솔직히 오락 등 별의별 프로그램을 다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뉴스에 ‘올인’ 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노현정을 스타로 만들어준 ‘상상플러스’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나운서가 끼와 재치로 무장한 연예인 MC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강수정도 아나운서의 ‘연예인화’ 논란에 불을 붙인 KBS ‘해피선데이’의 여걸식스 코너에서 최근 하차했고, MBC ‘무한도전’은 나경은 아나운서를 내세웠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전문직이지만 실질적인 ‘정년’이 짧은 것도 아나운서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한 아나운서는 “방송사가 기회를 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때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거나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눈길이 쏠렸을 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과감히 대외 활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오락까지 모든 프로그램을 다 할 수 있지만 역으로 어느 한 분야도 ‘불가침’의 영역으로 확실히 꿰차지 못하는 현실, 아나운서의 정체성 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위기의 심화에는 방송사측의 임기응변식 대응도 한 몫 한다. 방송계 인사는 “연예인화한 아나운서가 유독 KBS에 많은데, 이는 스타 MC의 몸값을 감당하기 어렵자 아나운서들을 오락 프로에 대거 기용한 결과”라며 “다른 방송사들도 아나운서의 자질에 따라 장르별로 전문화 해 키우려는 장기적인 안목과 노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아나운서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도 변하고 있다. 김주희 SBS 아나운서의 미스유니버스 대회 출전을 옹호한 여론이 적지 않았듯이, 일부에서는 아나운서를 ‘다소 지적인 연예인’으로 정의한다. 교양과 오락, 보도 프로그램의 구분이 갈수록 무너져가는 요즘, 이런 규정이 오히려 정답일 수도 있다. 연예인이되 연예인과는 다른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는 아나운서들의 선택과 노력에 달린 셈이다.
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이희정기자 jaylee@hk.co.kr
■ 일본에선 아나운서 '방송탤런트'로 불러… 연애인 된지 오래
일본에서는 아나운서를 ‘방송탤런트’ 혹은 ‘예능인’(藝能人)이라고도 부른다. 아나운서가 가수, 탤런트, 영화배우, 개그맨 등 분야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호칭이다. 지적인 이미지에 연예인 같은 끼를 겸비한 이들 아나운서들은 대중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90년대에는 ‘아나도르’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다. 아나운서와 아이돌(Idol)을 합성한 조어로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젊은 여성 아나운서들을 지칭한 말이다. 지금도 각 방송사는, 특히 민간 방송사들은 여성 아나운서를 아이돌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미 대중들에게 알려진 아이돌 스타나 대학의 대표 미인을 아나운서로 적극 채용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같은 노력 때문인지 일본에서 여성 아나운서는 여느 톱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여성 아나운서를 둘러싸고 인터넷상에서 벌어진 설전은 아나운서에 대한 양국민들의 인식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본 네티즌들은 비교의 척도를 ‘외모’에 놓고 “일본 아나운서가 한국 아나운서보다 월등하게 앞선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네티즌들은 “아나운서를 어떻게 외모로만 판단하느냐”고 되물으며 답답해 했다.
일본 방송사들은 남성 아나운서도 속칭 ‘킹카’들을 많이 뽑고 있다. 인기가 없으면 담당 프로그램도 적어지는 등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 아나운서의 본래 소양보다는 외모를 중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셈이다. 가끔 저질 아나운서 논란이 빚어지는 것도 이때문인 것 같다.
일본에서도 방송사에 소속되지 않은 아나운서를 ‘프리 아나운서’라고 부르는데, 처음부터 연예프로덕션을 통해 프리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 점이다.
◆ 아나운서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뉴스 보도, 사회, 실황 중계의 방송을 맡아 하는 사람, 또는 그런 직책."
▦한국언론재단 매스컴용어사전
"협의의 개념으로는 '뉴스 전달자'를 말하고 광의로는 방송에 출연하는 비(非)연예 인사, 또는 진행자를 뜻하는데 MC 스포츠캐스터 앵커 DJ 리포터 내레이터 등이 포함된다."
▦강성곤 KBS 아나운서
"바르고 정확한 우리말을 바탕으로 뉴스, 교양, 오락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
▦김주하 MBC 기자(아나운서 출신)
"어떻게 보면 백조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 위에 떠있는 모습은 한없이 고고하고 화려하지만 물 밑에선 끊임없이 발로 헤엄치며 뒤뚱거리잖아요. 참 아나운서가 되려면 이런 물밑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아요." (2003년 10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인희 경희대 교수(언론학)
"정규 교육을 받고 외모도 수려하며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언변을 갖춘 '고상하고 우아한 스피커(話者)'이다." (2004년 5월 국민일보 칼럼)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 "아나운서, 이유없이 좋아요" 아카데미에 가보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28일 부동산 재산세와 거래세 감면에 대한 지방세법…” TV모니터에서 진행되는 뉴스를 바라보는 눈빛과 손놀림이 부산하다. “‘열린우리당’이라고 급하게 읽지 말고 여유 있게 ‘열:린우리당’.” 수강생들은 이를 놓칠세라 형형색색의 펜으로 원고에 메모를 한다.
스피치 교육기관 ‘백지연 커뮤니케이션즈’의 아나운서반 수업은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나 한 수강생이 뉴스 진행을 마치며 “고맙습니다”라고 하자 교실은 일순간 웃음바다로 변한다. “마지막은 ‘뉴스를 마치겠습니다’로 해야지. 뭐가 고마워?” 방송인이자 이곳 대표인 백지연씨는 우스개소리를 던지며 긴장을 풀어준다.
▲ 아나운서를 꿈꾸는 이유
“이유없이 좋은 것 있잖아요. 제겐 아나운서가 그래요.” 29일 압구정동 백지연 커뮤니케이션즈에서 만난 황보람(25ㆍ여ㆍ가명)씨는 ‘왜 아나운서를 꿈꾸느냐’는 질문이 가장 어렵단다. 김영아(24ㆍ여ㆍ가명)씨는 “뉴스의 힘이란게 있지 않느냐”며 “수해방송 때 이재민들이 제 멘트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 책임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에게는 대체로 아나운서에 대한 명확한 상(像)이나 롤 모델은 없는 듯 했다. 장현빈(26ㆍ가명)씨는 “아나운서가 되면 돈을 못 받아도 즐겁게 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황보람씨는 “천편일률적인 9시 뉴스 앵커는 방송사도 시청자도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로 특색있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아나운서는 뉴스 전달자’란 공식은 옛말이 됐다. 임성훈 MC처럼 편안한 토크쇼 진행자를 꿈꾸기도 하고, 김성주 아나운서처럼 다방면의 끼를 발산하고 싶은 이도 있다. 하지만 ‘손석희, 백지연…’ 식의 모범답안은 들을 수 없다.
▲ '바늘구멍'같은 경쟁률
15일 접수가 끝난 MBC 아나운서 공채에는 여자 1,717명, 남자 434명이 지원했다. SBS도 남녀 2,000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KBS는 아직 공채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해 지상파 3사 입성에 성공하는 인원은 10명 안팎. 이처럼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지망생들은 오늘도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거나 지방, 케이블 방송사에서 경력을 쌓는다. 학력고사 시절의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란 말이 이들에겐 옛말이 아니다.
인터넷 방송국에서 일하며 공채를 준비 중인 송영미(25ㆍ여ㆍ가명)씨는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올바른 언어 구사’‘진행 능력’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발음, 발성에 뉴스 진행, MC, 내레이션, DJ, 스포츠중계…그 뿐인가요? 시사 공부에 국어, 외국어 학원, 순발력을 키우기 위한 연기학원 수강까지,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훈련을 받고 있죠”라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직업이다 보니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도 크다. 김영아씨는 “아나운서가 되려고 미인대회를 거치는 사람도 있는데, 아나운서가 연예인이라는 소릴 들을 땐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한 달에 200만원짜리 학원, 성형을 권하는 강사’ ‘화장과 옷은 어디서’등등 소문은 많죠. 준비하는 입장에서 불안하니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모두가 화려함을 바라지는 않아요.” 어디서든 지망생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백지연씨는 “보석은 휴지통에 버려두어도 빛나기 마련”이라며 “외양만 가꾸고, 오로지 입사에만 목표를 둔다면 단명하기 쉽다”고 말했다. 그는 지망생들에게 “자신의 매력과 소질을 살려 시사, 스포츠, 예능 분야로 전문화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 원로 아나운서 이규항씨 "우리말 언어운사 본분 잊지 말아야"
‘언어운사’(言語運士). MBC 아나운서국이 운영하는 웹진의 명칭이기도 한 이 말은 KBS 출신의 원로 아나운서 이규항(67)씨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아나운서의 역할을 정의한 조어다. 그는 ‘사’자를 ‘스승 사(師)’로 쓰기도 한다. “아나운서란 모름지기 언어의 테크니션이자 국민의 국어교사로서 우리 말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국내 최고령 야구중계 캐스터로, 대학과 사설아카데미의 방송언어 강사로 활동하며 ‘언어운사’ 역할에 충실한 그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을 어떻게 바라볼까.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를 무조건 탓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지요. 맷돌도 윗돌은 계속 돌지만 밑돌이 움직이지 않아야 제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어운사’란 말에 담긴 아나운서의 본분은 맷돌로 치면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되는 밑돌에 해당합니다.”
이씨는 말의 품격이 무너진 요즘 방송을 ‘언어교통사고’ 방송이라고 개탄한다. “‘춘향전’을 극화할 때 이도령과 춘향, 방자와 향단이 말씨의 품격 대비가 재미를 더하듯이 종합예술인 방송의 언어도 격식체와 비격식체가 공존합니다. 그런데 요즘 방송은 주류와 지류가 뒤바뀌어 방자와 향단이 말투가 판을 칩니다. 훈련이 안된 사이비 방송인의 마구잡이 기용 탓인데, 일부 아나운서들까지 본분을 잃고 부화뇌동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는 “아나운서 위기론은 과거에도 있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아나운서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도 “스타 대접에 들뜬 아나운서들도 그것이 노력의 결과인지, 50, 60대가 돼서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새겨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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