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말과 행동도 전염되는 것 같다. 어의(語義)가 급속히 확장돼 '엽기적'이라는 말에 '황당한' '놀라운' '해괴한' 등의 뜻까지 붙게 됐다는 걸 전제로 이 말을 쓸 때, 정치권 최고의 '엽기스타'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위상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은 여.야, 상.하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엽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언행으로 노 대통령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마치 집단 착란(錯亂) 같다. 무서운 일이다.
때가 때인 만큼, '바다이야기' 주변부터 보자. 열린우리당 정동채 의원은 심히 걱정되는 경우다. 사행성 오락산업이 암세포처럼 번지던 시기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그는 문책론이 들끓자 사과를 한답시고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당 비상대책위 상임위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온 나라가 '바다'에 침몰하고 수백만 서민이 고통으로 신음하게 됐는데, 당 지도부에서 물러나는 걸 '백의종군'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쯤 되면 확실한 착란 수준이고, 이런 사람을 한 때 문화정책의 수장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국민만 딱하게 됐다.
김근태 우리당 의장이 '뉴딜정책' 협조를 구하기 위해 참여연대를 찾았을 때, 그곳 김기식 사무처장의 언행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뉴딜정책이 "재벌 중심 성장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명쾌하게 선언하고, 김 의장을 단호히 내쳤다.
하지만 '고매한 뜻'과 별개로, 먹고 사는 일이 숙명적으로 얼마나 다급하고 비루(鄙陋)할 수도 있는 것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김 의장의 '비루한 선택'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김 처장의 단호함이 얼마나 엽기적으로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하고 서글픈 엽기와 달리,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엽기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여.야가 팽팽히 붙은 전시작전통제권 논란에서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최근 무슨 생각에선지 작전권 문제에 관해 대통령에게 느닷없는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는데, 이 제안은 결정적으로 지금을 20세기 군부정권시대 쯤으로 여기는 놀라운 착란상태를 드러냄으로써 만인의 웃음만 사고 말았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이 "한국의 작전권 단독행사 방침을 지지한다"며 정부.여당 편을 들자, "미국의 태도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미국을 한나라당원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은 증상으로, 말하자면 착란의 세계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모든 엽기와 착란도 결국 노 대통령을 넘지는 못했다. 노 대통령은 이번에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발한 착란을 '구사'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 착란에 빠뜨리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 부문의 그랑프리를 다시 한 번 차지하고야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은 '바다이야기' 파문에 대해 "이런 엄청난 정책실패로 서민들을 고통에 빠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크게 무너뜨린 점에 대해 국민들께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정책적 오류 말고는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일은 없다"고 강변했다. 당연히 '부끄러운 일은 없다'에 강조점이 찍혀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이 착란이 얼마나 교묘한지, 우리당 김한길 대표조차 얼떨결에 한 때 "게이트라 할 만한 (정부)개입은 없다"며 박자를 맞췄을 정도였다.
'정책실패가 비리 보단 떳떳한 거 아니냐'는 이 가공할 만한 '노무현식 착란'에 두 말 없는 '경의'를 표한다.
장인철 정치부 차장대우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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