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자화상’ 과 ‘해바라기’로 이름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나폴레옹, 소크라테스, 알렉산더 대왕이 공통적으로 앓았던 질환은 무엇일까. 이들이 ‘천형’ 으로 인식돼온 간질 환자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간질(癎疾)은 고대 그리스시대 이전에 이미 ‘신성병’이라는 병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역사가 깊다. 때문에 고흐와 같이 간질을 앓고 있으면서도 생애의 업적을 이룬 유명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편적인 간질 환자들의 삶은 힘들기 짝이 없다. 이들은 발작이 가져오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욱 아픈 사회적인 편견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의 유명인들이 간질을 이겨내고 업적을 일궈내는 모습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파악되는 간질환자는 대략 30만명에 달하며 유병률도 2%에 이른다. 이들은 ‘유전병’, ‘정신이상자’ 와 같은 확인되지 않은 편견의 굴레에 얽혀 결혼과 취업 같은 일반인의 소소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간질협회가 지정한 간질의 날(9월 9일)을 맞아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간질의 ‘편견’에 대해 소개한다.
간질은 불치병?
간질은 뇌 신경세포의 전기적 기능이상으로 빚어지는 증상으로 부정기적인 발작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간질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태어날 때부터 체질적으로 발작을 쉽게 일으키는 경우(60%)와 일반인으로 살다가 사고 등으로 뇌 손상을 입었을 경우(40%)다. 특히 두 번째 경우는 생각외로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충돌, 중풍, 뇌막염 등으로 뇌수술을 받았을 때 대뇌피질이 손상을 입으면 간질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평생동안 간질 발작을 경험할 확률이 9%에 이른다고 하니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간질은 통상 불치병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전문의들은 “약만 잘 쓰면 80%의 환자가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간질의 치료법은 수술과 약물치료로 나뉜다. 수술의 경우 적용할 수 있는 경우가 난치성 환자의 10%에 불과해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다.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가 약물치료에 의존하게 된다. 여기에 쓰이는 약은 주로 항경련제로 규칙적인 복용수칙을 지키면 환자의 80%가 2년 동안 발작을 경험하지 않게 되고 이중 50%는 5년 간 발작이 없는 ‘일반인의 삶’으로 컴백하게 된다.
허 균 아주대학교 신경과 교수는 “대체로 10~15년 꾸준히 약을 먹은 환자는 대부분 완치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간질을 불치병으로 보는 것은 오해” 라며 “이렇듯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라 특히 어렸을 때 병증을 확인해 조기 치료하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최근에는 목 신경에 전기자극을 줘 발작을 줄여주는 미주신경자극법(VNS)과 같은 새로운 요법들이 나오는 등 치료환경이 좋아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약과 치료법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아 평생을 간질환자로 살아야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덧붙였다.
간질은 유전된다?
간질을 불치병으로 오인하는 것처럼 ‘유전병’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 간질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는 10%에도 못 미친다. 간질증상을 보이는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명이라도 간질 병력이 있는 경우는 10명중 1명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간질 환자들도 건강한 성생활을 비롯해 임신과 출산을 해도 무방하다. 약물치료를 받는 경우라도 미리 양을 조절하면 기형아를 출산하는 확률은 크게 늘지 않는다.
간질환자는 지능이 떨어지거나 성격에 심각한 장애가 있을까. 한 때는 간질이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간질증상은 뇌기능적 장애로 인해 일시적으로 과도한 전기적 흥분 상태가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대부분의 간질 환자들은 정상적인 지능과 감정 및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 다만 난치성 환자들 중 약물 다량 복용으로 인지기능 감퇴증상이 일부 나타나기도 한다.
또 대부분의 간질 환자들은 1년 동안 한 두 차례 미만의 발작 증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일반인과 같은 직업을 갖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IBM사와 포드사에서는 사내 연구를 통해 간질을 가지고 있는 근로자들의 생산성이 오히려 일반 근로자들보다 앞선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적도 있다. 하지만 간질 환자들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수면부족이 발생하는 직업을 피하는 게 현명하다.
이상도 계명대학교 신경과 교수는 “의학의 발달로 대부분의 간질 환자들이 일반인과 다름없이 학업 취업 결혼 출산이 가능해졌음에도 간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부정적인 태도가 남아있는 게 현실” 이라며 “누구나 후천적으로 간질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편견을 하루빨리 버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간질 발작 시 도움 요령
① 발작이 시작되면 다른 사람이 멈출 수 없다. 발작이 자연적으로 멎을 때까지 가만히 있도록 한다. 인공 호흡 등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② 환자를 바닥에 편하게 눕히고, 옷의 단추나 혁대 등을 풀어 느슨하게 해 준다.
③ 주변의 딱딱하거나 날카롭거나 뜨거운 물체를 치우고 머리 아래에 방석이나 부드러운 담요 등을 놓아 발작 중에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한다.
④ 환자를 옆으로 눕게 해 입에 고인 침이나 타액이 옆으로 흘러나오게 한다.
⑤ 발작 중에 절대로 환자의 입 안에 무엇을 넣지 않는다.
⑥ 발작이 끝난 후에 환자는 반드시 쉬거나 숙면을 취해야 한다.
⑦ 휴식을 취한 후에도 계속 비틀거리고, 혼동하고 불안해 하면 집으로 데려다 주는 게 좋다.
⑧ 어린이가 발작을 하면, 빨리 부모나 보호자에게 연락을 한다.
⑨ 10분 이상 전신 발작이 지속되면 빨리 병원으로 옮겨 응급 치료를 받아야 한다.
도움말: 홍승봉 성대의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
도움 한국간질협회, 대한간질학회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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