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님이 저를 구한 건 굉장한 얘기(Amazing Story)에요. 생명의 은인을 다시 뵙게 돼 기뻐요."
목소리는 심하게 들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28일 오후 7시(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민스터시 '리틀 사이공'의 피터 누엔(62)씨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에 또렷한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같은 시각(한국시간 29일 오전 10시) 경남 통영시의 전제용(66)씨는 자신의 멍게 양식장에 나가 있었다. 부인 김기자(49)씨는 "미국에서 동생이 오기 전에 일 다해놓는다고 휴대폰도 꺼놓고 밤 늦게까지 일한다.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광활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형제가 됐다. 피를 나눈 게 형제라지만 이들은 그보다 갚진 생명을 구하고 빚진 사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친형제 이상이라고 한다. 생명을 빚진 동생 누엔씨 부부가 다음달 7일 한국을 찾는다. 21년 만에 이뤄지는 보은(報恩)의 방한이다.
아름답고 기막힌 인연의 끈은 1985년 11월 14일 처음 맺어졌다. 당시 K해운 소속 참치잡이 원양어선(광명 87호) 선장이었던 전씨는 해질 무렵 남중국해에서 침몰 직전의 일엽편주를 발견했다. 베트남 난민인 '보트피플' 10여명이 물을 퍼내느라 탈진한 채 갑판에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씨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구조 지시를 내렸다. 그가 구한 인원은 모두 96명, 그 중엔 난민 대표를 맡았던 누엔씨 부부도 있었다. 전씨의 말처럼 "그날의 판단은 정말 정확했지만" 그는 이후 옛 안기부 등의 조사에 시달려야 했고 직장마저 잃었다. 난민들은 부산 해운대구의 적십자사 난민촌 캠프에 머물다 미국과 프랑스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2, 3차례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던 누엔씨 역시 "임산부가 아기를 낳아 당신이 구한 생명은 97명이 됐다"는 서신을 끝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을 묶은 인연의 매듭은 질기고 성겼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자리를 잡은 누엔씨는 2002년 어렵사리 전씨의 연락처를 알아내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2년 전 전씨 가족은 누엔씨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감격의 재회를 맛보았다.
그 뒤부턴 피붙이보다 더 자주 연락을 취했다. 매달 몇 차례씩 국제전화를 하는가 하면 이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누엔씨가 수화기 너머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전씨는 "동생, 나도 사랑해"라고 답하고, 서로 의사소통이 막히면 전씨의 딸 휘진(18)씨가 나서서 통역을 해주는 식이다.
전씨는 "전화로도 손짓 발짓 영어 하는 법을 터득했다"며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지만 그 마음만은 오롯이 주고 받는다"고 웃었다. 그는 "반갑긴 한대 날씨가 더워서 걱정"이라며 "오붓하게 가족끼리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경치 좋은 곳도 들릴 생각으로 한달 일정을 아예 비워뒀다"고 했다.
누엔씨는 2년 전 전씨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은퇴하면 한국에 꼭 가겠다"고 약속했다. 5월 초 간호사를 그만두고 각종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전씨에게 평생 잊지 못할 보은의 의미로 전씨와의 인연을 담은 저서 '바다처럼 마음이 넓은 사나이'를 집필 중이다. 그는 "내가 생명을 구한 건 캡틴 전이 베푼 기적이고 그 은혜를 평생 갚고 싶다"고 했다.
그는 "2주 동안 캡틴 전의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태영(통영을 잘못 부름) 풍경도 구경하고 부산에도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를 받아준 한국정부와 한국인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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