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넌 왜 그렇게 덜렁대니?"라는 핀잔이었다. 집에서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학교 친구들도 "너는 거의 기억상실증에 가까워"라고 놀리곤 했다.
● 철저한 계획표 없으면 불안
고교 때는 도시락가방을 학교에 놔두고 와서, 어머니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들으며 다음날 다른 도시락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 거의 집 문 앞에 다 와서야 내 손에 어떠한 도시락가방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소하는 친구들이 내 책상에 걸려있는 두 개의 도시락가방을 보면서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점심을 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대학 때는 가방을 지하철에 놓고 내려 강의실에 들어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희한한 것은 일할 때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덜렁거림을 만회하고자 함인지 모르겠지만,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을 하지 않으면 내내 불안과 울렁증에 시달린다. 시험이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면, 오늘부터 내일까지는 국어 몇 페이지를 끝내고, 수학 몇 문제를 풀고 등등을 책상 옆에 적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꼭 전체 목표의 몇 프로를 달성했는지를 초록색 형광펜으로 기록하였다. 초록색이 벽에 마구 칠해져 있어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런 버릇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출근하면 첫번째로 하는 일이 A4 용지로 내가 직접 만들어놓은 계획표에 오늘 할 일들, 오늘 전화하거나 메일 보내야 할 사람들을 빼곡히 적는 일이다.
계획표 맨 아래에는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키보드가 아니라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이 내 경쟁력이다'와 같은 유치한 문구들을 매일 같이 반복해서 적는다. 그리고 일처리가 끝날 때마다 계획표에 역시 초록색 형광펜으로 체크를 해나간다. 옆방의 동료는 우연히 이 계획표를 목격하고, 자기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면서 "네가 무서워졌어"라고 얘기하였다.
나의 계획 짜기가 일에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 버릇은 TV보는 데까지 이어진다. 일요일 저녁에는 내주에 있을 중요한 스포츠 이벤트들을 메모지에 다 정리한다. 어느 채널에 어떤 경기가 있는지.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메모지를 비디오 옆에 놓고 이에 따라 녹화를 해 나간다. 녹화해놓고 못 본 테이프가 이미 수북이 쌓여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만약 이를 소홀히 해서 박지성이 출전하는 경기라도 놓치게 되면 어찌나 억울한지 모른다. 와이프는 이런 나를 보고 정말로 신기해한다. 정작 와이프는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놀고 일을 하는 편이다.
● 그래서 편해지는 걸까
지금도 내 책상에는 금년도에 하고 있는 과제들의 진행상황이 도표로 그려져있고, 그 옆에는 조그만 달력에 중요한 일들이 체크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오늘의 계획표가 놓여져있다. 누가 보면 정말 머리 아프고 피곤하게 산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래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다.
최항섭ㆍ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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