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발행ㆍ9,800원
어떤 사건을 다수의 기억을 통해 복원할 때 우리는 자주 당혹스러워진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처럼 언술주체들의 ‘계산’이 개입되기 십상인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조차 일치된 기억의 진술을 만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처럼 불완전한 기억은 심지어 짓궂기까지 해서, 제멋대로 자신을 가공하고 치장하기도 한다. 존재가 기억의 총체라는 말은, 발화된 맥락에서의 의미와는 별개로, 우리가 허구의 세상을 사는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인식을 환기시킨다.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장편소설 ‘매혹’은 그 간단치 않은 존재와 기억의 면모를 환상소설의 기법으로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이 얇지않은 소설은 100여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얽힌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드물지않은 삼각연애 서사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면 풍경이 표변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기억의 세계가 펼쳐진다. 동일한 사건이 기억 속에서 판이하게 변주되고, 독자들은 기억의 미궁, 소설의 미궁 속으로 빠져간다.
소설은 촬영기사 ‘그레이’의 병상 이야기로 시작한다. 내전ㆍ폭동의 현장을 누비며 동영상을 찍어온 베테랑 촬영기사인 그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폭탄테러 현장을 지나다 중상을 입고, ‘역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사고 직전 일정 기간동안의 기억만을 잃어버린 것이다. 의사들은 이 병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한 자발적 증상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런 그에게 한 여자가 찾아온다. ‘수잔 큘리’라는 20대 중반의 매력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그녀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레이의 뜨거운 연인이었노라고, 자신의 존재가 그레이의 결락된 기억을 잇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3인칭 시점- 그레이의 1인칭 시점- 다시 3인칭- 수잔의 1인칭 시점을 교차하고, 사건 전후의 시간들을 오가며 현란하게 이어진다.
기억의 문제는, ‘글래머’라는 힘을 지닌 불가시(不可視) 존재의 등장으로 더욱 복잡해진다. 불가시인이란 투명인간과 흡사한 존재다. 다른 점은, 웰스의 ‘투명인간’이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감은 있는 데 반해 글래머의 불가시인은 타자의 시선이 그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달리 말해 (타자가) ‘인지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다. 한나절 내내 거리를 쏘다니고도 아무 것도 본 게 없는 듯한 경험을 했을 때, 우리가 스쳐갔던 그 숱한 풍경 같은 것. “시각적인 관심에는 서열이 있어. 어떤 사람들의 집합이든 간에, 거기엔 언제나 맨 마지막 주의를 끄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299쪽) 그리고 끝내 주의를 끌지 못하는, 아니 스스로 구름 같은 ‘오라’(AURA)를 뿜어내 주의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존재들. 그들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또 그 시선의 기억에 의해 제 정체성을 박탈당한다. 또 ‘글래머’란 스스로를 불가시 존재로 변신시키는 힘을 일컫는다.
소설에서 수잔과 그의 남자친구인 ‘나이얼’은 불가시인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그레이가 자신 역시 글래머를 지닌 존재임을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그를 통해 작가는 지각과 기억, 또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의 본질에 치명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던진다. “사람은 누구나 픽션을 창조하는 존재야. 겉과 속이 똑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람은 현재의 자기상에 맞춰 기억을 재배열하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그러지는 않아.… 자기 자신을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픽션으로 고쳐 쓰려는 욕구는 우리 모두의 내부에 깃들여 있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글래머를 두르고….”(418쪽)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여러 목소리로 술회된 나 자신의 이야기”(11쪽)다. 기억의 미궁, 소설의 미궁을 빠져나온 당신은, 이제 존재의 미궁, 세계의 미궁 속에 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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