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이라는 이름이 매스미디어를 달구던 지난해 말, 대한민국은 ‘황빠’와 ‘황까’로 쪼개졌다. ‘황빠’는 황우석씨를 (뜨겁게) 지지하는 사람을 뜻하고, ‘황까’는 황우석씨를 (거세게) 비판하는 사람을 뜻한다. 처음에 한국인들의 압도적 다수는 황빠였다. 거의 모든 언론이 황우석씨의 성인전(聖人傳)을 써대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줄기세포 기술을 ‘마술’이라고까지 추어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황우석씨가 여러 차례 논문을 조작했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황씨의 비상식적 처신이 이어지자, 어느 시점부터는 황까가 다수가 된 듯하다. 물론 황빠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아직 건재하다. 그리고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빠순이’(열성적 여성 팬), ‘빠돌이’(열성적 남성 팬)들이 그렇듯, 황빠 역시 논리적으로 설득된 사람들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매혹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매혹된 영혼 앞에서 ‘사실’과 ‘논리’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다.
황우석 사건은 한국인들의 언어 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사건이 생명공학 분야의 전문 술어들을 일상어로 끌어들였다는 점일 테다. 그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또 그 전까지 주로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 통용되던 접미사 ‘-빠’와 ‘-까’를 인터넷 바깥으로까지 끌어내 일반인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빠’는 어떤 사람의 열성적 지지자나 열렬한 팬을 뜻한다.
남성 연예인을 ‘오빠’라 부르며 따라다니는 극성 여성 팬을 가리키는 ‘빠순이’(또는 집합적으로 ‘오빠부대’)가 이 신종 접미사의 어원일 것이다. ‘빠순이’는 ‘오빠부대’의 일원인 만큼 대체로 여중생이나 여고생이기 마련이지만, ‘-빠’는 ‘빠순이’나 ‘오빠부대’의 성적(性的) 세대적 벽을 허물었다. 그래서 황빠는 60대 남성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빠’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별에 따라, 앞에서 거론한 ‘빠순이’와 ‘빠돌이’로 나뉜다. 그러나 ‘-빠’와 ‘빠순이’ ‘빠돌이’ 사이엔 뉘앙스 차이가 있다. ‘-빠’라는 접미사에도 얼마간의 경멸 뉘앙스가 배어있지만, ‘빠순이’ ‘빠돌이’에서는 이 뉘앙스가 한결 더 짙어진다. 그래서 ‘황우석 빠순이’나 ‘황우석 빠돌이’는 그것의 줄임말이라 할 ‘황빠’보다도 한결 더 비이성적이고 막무가내라는 느낌을 준다. 남성형 ‘빠돌이’의 기본형이자 접미사 ‘-빠’의 어원인 ‘빠순이’는 인터넷에서 (음이 비슷한) ‘박순희’라는 고유명사의 옷이 입혀진 채 에둘러 표현되기도 했다.
‘빠순이’ ‘빠돌이’는 근본적으로 10대 언어이자 속어다. 그러니, 2002년 대선 때, 한 후보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귀족이미지와 노인이미지를 중화하려 시도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말을 발설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됐다. 이 말의 ‘젊음’과 ‘비속함’을 제 것으로 만들 연기력이나 진심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일 테다.
접미사 ‘-빠’의 대척에 있는 ‘-까’는 드센 반대자, 이른바 ‘안티팬’을 뜻한다. ‘남의 결점을 들어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까다’에서 온 말이라는 견해도 있고, 하드코어 비속어인 ‘X까!’(헛소리 집어치워!)나 ‘까고 있네’(웃기고 있네) 같은 표현에서 온 말이라는 견해도 있다. 아마 그 둘 다가 버무려지면서 이 새로운 접미사가 태어났을 것이다. 접미사 ‘-까’의 생년일이 ‘-빠’의 생년일보다 늦은 것은 확실하다. 수많은 종류의 ‘-빠’가 등장한 뒤에야 ‘-까’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넷에 숱하게 웅크리고 있는 팬사이트들이 ‘-빠’의 근거지라면, 안티사이트(안티인터넷)들은 ‘-까’의 거처다.
황우석 사건이 접미사 ‘-빠’와 ‘-까’의 대중화에 결정적 모멘텀을 주긴 했으나, 이 말들의 대중화에 시동을 건 것은 2002년 대통령 선거다. 노무현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그 반대자들이 ‘노빠’라 부르기 시작하자, 지지자들은 이 말에 담긴 경멸 뉘앙스를 걷어내고 기꺼이 ‘노빠’를 자임했다. 선거 뒤, 대통령의 정치적 친위활동을 이끈 한 정치인은 ‘노빠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자임하기도 했다.
여기에 맞서 ‘노까’도 등장했다. 노 대통령의 실정이 거듭되자, ‘노까’는 영남 지역의 전통적 보수층에서만이 아니라 지역과 계급과 이념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유권자들로부터 충원됐다. ‘노빠’가 노 대통령에게 논리적으로 설득된 사람이라기보다 감성적으로 매혹된 사람이듯, ‘노까’ 역시, 적어도 일부는, 노 대통령의 정책이나 스타일에 논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그에게 일단 증오부터 드러내고 보는 사람들이랄 수 있다. 깊이 따져보는 일 없이 그저 노무현은 ‘비호감’이라고 결정해버린 사람들 말이다. 일반적으로, ‘-빠’와 ‘-까’는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논리적 판단보다는 좋은가 싫은가에 대한 정서적 판단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빠’의 언어들은 이른바 가르랑말(purr words)에 속하고, ‘-까’의 언어들은 이른바 으르렁말(snarl words)에 속한다. 이 생생한 조어를 통한 깔끔한 분류는 새뮤얼 하야카와라는 캐나다 출신 일본계 미국인 언어학자의 것이다. 그는 ‘생각과 행동 속의 언어’라는 책에서 언어의 함축 의미를 따져보며,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을 맞세웠다.
하야카와가 든 예를 옮기자면, “이런 버러지 같은 놈!”(You filthy scum!)은 전형적인 으르렁말이고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여자야”(You’re the sweetest girl in all the world)는 전형적인 가르랑말이다. 앞의 말은 남을 위협하거나 모욕하는 으르렁거림이고, 뒤의 말은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듯 남의 호감을 사려는 언어행위다.
으르렁말이나 가르랑말에서는 언어의 소통 기능 가운데 중립적 정보 기능이 거의 사라지고, 그 대신 표현적 기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런 말들에 담긴 의미는 개념보다 정서에 가깝다. 으르렁말의 극단적 형태는 욕설이나 저주다. 반면에 연인들 사이의 밀어(蜜語)나 독재자(또는 전제 군주) 이름 앞에 흔히 붙는 갖가지 존칭 수식사들은 가르랑말의 극단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으르렁말이나 가르랑말이 가장 시끌시끌하게 날아다니는 곳은 인터넷이다. 연예인들의 팬사이트만이 아니라, 무슨무슨 ‘사모’(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돌림의 정치인 지지자 사이트에선 가르랑말이 휘날린다. 반면에 안티사이트에서는 해당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향한 으르렁말이 펄럭인다.
놀랍지 않게도, 숱한 가르랑말의 대상이 되는 ‘스타’는 동시에 으르렁말의 표적이 되는 일이 흔하다. 그것은 한쪽에서 격렬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쪽에서 격렬한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빠’와 ‘-까’의 존재론이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노빠들의 가르랑말이 화려해질수록 노까들의 으르렁말은 사나워지고, 노까들의 그 사나워진 으르렁말은 다시 노빠들의 가르랑말을 더 화려하게 만든다.
한 개인이 으르렁말만 쓴다거나 가르랑말만 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빠’는 그 경쟁자나 적대자의 ‘-까’이기 쉽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빠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경쟁자나 적대자들에 대해서 ‘-까’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한 개인이 누군가의 ‘빠돌이’로서 가르랑말을 늘어놓는 한편 다른 누군가의 ‘까돌이’로서 으르렁말을 늘어놓는 일도 드물지 않다.
‘노비어천가’니 ‘노기도문’이니 하는 비아냥거림을 받은 최상의 가르랑말을 정치인 노무현에게 바친 어느 시인은 노무현의 정치적 경쟁자나 적대자들에게는 넘친다 싶을 만큼 가혹한 으르렁말을 던지기 일쑤였다. 또 으르렁말끼리도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노 대통령을 표적으로 삼은 노까들의 으르렁말이 사나워지면, 노 대통령의 정적들을 향한 노빠들의 으르렁말은 더 사나워지고, 노빠들의 사나워진 으르렁말은 노까들의 으르렁말을 더욱 사납게 만든다.
가르랑말이든 으르렁말이든, 이런 정서적 언어들은 커뮤니케이션을 다채롭게 하는 한편 교란시킨다. 그것이 상대방을 인정하는 ‘대화’보다는 자족적이고 과시적인 ‘표현’에 더 기여하기 때문이다. 가르랑말은 더러 듣기 역겹다. 특히 그것이 권력의 맥락을 타고 발설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 것은 으르렁말이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욕설들은 대화나 설득에 조금도 이바지할 수 없다.
그것은 같은 편끼리의 씁쓰레한 자족감을 고양하고 동아리 의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욕설에 가까운 으르렁말이 익명의 너울을 쓴 네티즌들의 손가락에서만이 아니라 공식석상의 정치인들 입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여성 의원은 바로 그런 으르렁말의 일상적 사용으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크게 불렸다. 어떤 공동체가 지금 한국 사회처럼 ‘-빠’와 ‘-까’로 선명히 쪼개져 있을 땐, 아무리 비속한 으르렁말도(그리고 아무리 역겨운 가르랑말도) 절반의 지지를 얻게 마련이다. 그 여성 정치인은 지혜롭게도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으르렁말의 사용에선 지식인 출신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으르렁말을 던지면서도 ‘먹물 티’를 슬그머니 또는 노골적으로 낸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씨가 거론한 예지만, “노 대통령은 왼쪽, 오른쪽 뇌를 연결시켜 주는 부분에 문제가 있어서 정상국가를 기대하기 어렵다”(한나라당 공성진 의원)거나, “종 땡 치면 밥 주는 걸로 아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는 발언이 대화에 이바지하기는 어렵다. 그것들은 그저 발설자의 호승심(好勝心)을 충족시켜주는 모욕의 언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공적 담론의 마당에서까지 오늘날의 한국어가 으르렁말과 가르랑말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정서적으로 뜨겁다는 뜻일 테다. 말하자면 열정적이라는 뜻일 테다. 역사가 가르치듯 열정은 모든 진보의 동력이지만, 파괴와 자기파괴를 부추기는 영혼의 병이기도 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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