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확산’을 내건 미국의 중동정책이 역풍을 맞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중동의 민심을 미국의 구상과는 180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이 ‘테러단체’로 지목한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무지막지한 이스라엘의 공습에 맞서 한 달이나 버티며 아랍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스라엘을 편든 미국은 레바논 사태를 겪으며 중동에서 스스로 발목을 붙잡는 꼴이 됐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필립 고든 선임연구원과 제레미 사피로 연구원은 21일 파이낸셜 타임스 공동 기고문에서 레바논 사태의 패자는 미국이라고 평가했다.
기고문은 레바논 사태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태도 및 처신이 가져온 역효과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무슬림이 충돌한 레바논 사태를 계기로 시아파 무슬림은 물론이고 미국에 비교적 우호적인 수니파까지 반미전선에 가세했고, 이라크에서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저항세력의 테러 공격이 극성을 부리게 됐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이라크 내전 가능성에 대한 여러 우려들을 듣고 있다"고 말해 처음으로 이라크 내전 발발 가능성을 언급했다.
부시 대통령은 "중동의 실패한 국가들은 미국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며 실패한 이라크는 미국을 테러리스트들과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기 쉬운 안보 취약국가로 만들 것”이라며 미국의 중동정책이 위기상황임을 시사했다.
미국은 9ㆍ11 테러 이후 5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더욱 고전하게 생겼다. 어린이 등 레바논의 무고한 생명들이 이스라엘 전투기가 퍼붓는 무차별 폭격에 희생되는 참혹한 현장이 위성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각국에 전달되면서, 세계 곳곳에서는 이슬람 지하드(聖戰) 지원자들도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사태에서 가장 만족할만한 성적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 중동에서 미국식 민주주의 확산 구상에 가장 위협적인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레바논 사태를 통해 중동의 아랍 국가들과 아랍인들이 배운 교훈은 이스라엘과 미국 등 서구와의 역사적 관계에서 패배주의에 빠졌던 아랍의 자긍심과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는 헤즈볼라가 레바논 사태에서 거둔 성과를 계기로 아랍국가들에서 이슬람 정치운동이 정치개혁의 대안으로 강력한 추진력을 받기 시작했다고 20일 전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하려는 미 중동 정책의 예기치 않은 결과로 나타난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세력의 제도권 진입은 앞으로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의회 진출에 성공하는 등 이슬람 정치운동의 제도정치 입성은 이제 막 걸음마 단계다.
이집트 등 중동 각국에서 실패한 범아랍주의, 미숙한 민주주의, 부패 정권에 실망해온 민심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대안을 모색하면서 나타난 변화이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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