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는 사회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어수선했다. 'X파일 사건'이 몰고 온 충격 때문이었다. 당시 '이상호 기자는 훌륭했다'라는 칼럼을 쓰면서 인용했던 글이 있다. 2001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문이다.
수정헌법 1조에 따른 언론자유 보호는 전화 휴대전화 이메일 등을 도청할 수 없도록 규정한 도청금지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고, 6대 3으로 판시한 것이다. "제3자의 불법적 행위가 공적 관심사를 밝힌 언론에 대한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막을 거둘 수는 없다."
이제 미국 판례를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중앙지법이 최근 이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보도행위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는 정당행위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 보도행위의 경우 공적 관심사에 대해 보도해야 할 중대한 공익상 필요성이 인정된다. 보도의 동기나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상당성, 보호법익과 침해이익 사이의 균형 등을 헌법 취지에 비춰 판단해 볼 때, 위법성이 조각(성립되지 않음)된다."
● 언론자유는 민주주의 핵심
불과 1년 사이에 많이 잊혀지고 조용해졌지만, 크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번 판결도 '언론자유'와 '통신비밀 보호'라는 법리가 충돌하는 사건에 대한 국내 최초의 판결이다. 명쾌하게 법 정신을 해석한 법원이 자랑스럽다. 국민의 알 권리는 언론자유의 요체이며, 또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최근 전직 고법 부장판사와 검사 등이 법조비리에 연루되어 대법원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불행도 있었지만, 법원이 이렇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한 법원에 대한 믿음을 거두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를 예상키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 기자 역시 무죄 판결을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그는 "오늘 판결은 내가 읽었던 어떤 시나 수필보다도 아름다웠다"며 감격했다. 그 만큼 우리 사회에는 비합리적 보수주의가 만연해 있다. 당시 칼럼을 쓰면서 힘들게 찾아낸 미국 판례가 그 후 큰 힘이 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한 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자를 지지하는 칼럼을 쓴 유일한 언론인'이라는 이유가 계기가 되어, 관록있는 언론단체가 주최하는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주제 발표를 듣고 놀라고 크게 실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언론인과 언론학자들이 첨예한 문제를 놓고 세미나를 열었으니, 당연히 알 권리와 언론자유를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과 진지한 이론이 토로될 것으로 기대했다. 반대였다. 언론자유보다 통신비밀이 왜 보호돼야 하는지를 정치(精緻)하게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 기자는 기자 본연의 소명을 다했을 뿐이고, 또한 그런 것을 해내는 것이 언론이다. 그러나 1년 전 보수 언론도 언론자유보다 통신비밀 보호의 편을 들었다. 이번 판결이 난 후도 변함이 없다. 중도ㆍ진보 신문들이 '알 권리에 손들어준 X파일 보도 무죄판결' 등으로 지지 사설을 쓴 데 비해, 보수 신문들은 마지 못한 듯 작은 양의 사실보도를 했고 사설도 쓰지 않았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일부 인사들은 좌파 세력이 우리 사회를 온통 좌지우지하는 듯이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거의 보수우익 세력의 독무대나 다름없다. 현 정부의 행적도, 이른바 개혁-보수세력 간의 불협화음만 요란했을 뿐, 자신이 원했든 그렇지 않든 보수우익 정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진실만이 힘이 있다'
새삼 X파일로 인해 과거 불법도청 사실이 드러나 뭇매를 맞던 김승규 국정원장의 의미 깊은 사과문이 떠오른다. <진실만이 힘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글처럼 재판에서 진실이 승리한 것이 기쁘다. 이번 빛나는 판결이 민주주의를 키우는 비옥한 거름이 될 것으로 믿는다. 진실만이>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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