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사 경비대대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경비병들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두 장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에서 한국 노무자들을 동원, 관측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북한군 경비병들은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에게 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러 보니파스 대위는 현장에서, 바레트 중위는 헬기로 후송 중 숨졌다. 미군 경비병 4명과 한국 경비병 2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3~4분 만에 벌어진 일이어서 대기 중이던 유엔군 기동타격대도 손을 쓰지 못했다
■ 당시 휴가차 일본에 머물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대장은 다급한 나머지 전투기 뒷자리에 타고 귀임, 즉각 데프콘-3를 발동했다. 한국전쟁 후에 발동된 최고의 경계태세였다. 미국 본토에서 핵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폭기 20대가 날아왔다.
괌 기지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는 F-4 전투기 24대가 발진해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미 7함대 소속 항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로 북상했다. 북한군도 전투태세에 돌입했고 북한 전역에 준전시상태가 내려졌다.
■ 사건 사흘 뒤인 21일 오전 7시 미루나무 베기 '폴 버니언 작전'이 개시됐다. 작전에는 한국군 1공수여단에서 선발된 정예요원 64명이 투입됐다. M 16소총, 수류탄 크레모어 등으로 무장한 이들은 미루나무를 베어버리고 북한군의 초소 4개도 부숴버렸다.
미국은 작전 중에 교전사태가 발생하면 개성 지역 인민군막사 포격과 인민군 포병부대 궤멸은 물론 연백평야까지 점령하는 우발계획을 세웠다. 북한군의 대규모 전차부대가 남하할 경우엔 전술핵 사용도 고려했다고 한다. 다행히 북한군 경비병들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지켜만 봐 더 이상의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 도끼만행은 후계체제 하에 전권을 장악해가던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김일성은 뒤늦게 사건을 보고 받고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결국 김일성이 유엔사측에 유감성명을 전달함으로써 6ㆍ25 이후 가장 전쟁상태에 가까이 갔던 상황이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한미양국은 이 사건 대처과정에서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연합작전 필요성을 절감했고 2년 뒤 한미연합사를 출범시켰다. 도끼만행 사건 후 30년이 지난 지금 한미연합사 해체로 이어질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한 세대가 지났으니 새 틀을 짜야겠으나 국민의 안보불안도 한번쯤 살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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