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이 16일 고개를 숙였다. 이 대법원장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게 된 원인이 ‘우리 스스로’에게 있음을 통감하고 자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비리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사법부의 풍토와 문화 자체에 응분의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법관들의 어떤 사고방식이 국민들의 기대와 동떨어진 관행을 용납하게 했는지, 어떤 행동이 특권적 선민(選民)의식의 발로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는지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날 대법원의 표정은 사뭇 엄숙했다. 오전 10시 이 대법원장이 전국법원장회의석상에 들어서기 직전 “박수를 삼가기 바란다”는 사회자의 숙연한 부탁은 이날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이어 대법원장이 12명의 대법관을 대동한 채 대국민 사과의 뜻을 표명하는 사법사상 초유의 모습이 연출됐다. 이를 바라보는 전국 법원장 26명의 얼굴에서는 침통함과 비장함이 묻어났다. 법원장들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법조비리 근절방안 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다.
이날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법원 내에서는 갖은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대법원은 지난 주 조관행 전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구속된 직후 대국민 사과와 함께 법조비리 근절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오래 끌어서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일부 그릇된 법관 때문에 사법부 전체가 매도돼서는 안 된다”는 등 일선 판사들의 동요가 이어졌고 대법원 수뇌부는 급히 판사들의 의견 수렴을 지시했다. “과거처럼 후배들이 선배들한테서 엄격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잘못된 관행에 젖어온 일부 선배들의 탓이 크다” 등과 같은 신구(新舊) 갈등도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인지 이날 이 대법원장의 훈시에서는 모든 법관들을 감싸 안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대법원장은 훈시 도중 “우리 법관들은 개인생활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격무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왔고 청렴하게 처신하면서 공평무사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해 왔다” “국민들은 우리가 법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도자에게나 어울릴 만한 엄격한 도덕성과 고도의 자기절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법관 여러분 모두 감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으로 안다”고 언급했다. 전국법원장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모든 법관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새로운 사법부의 미래를 위해 합심할 수 있도록 법원장들이 힘써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 후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일회성 구호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법원 역시 법이 개정돼 강력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비리 근절이 어렵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내부 갈등 봉합과 비리 근절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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