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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아내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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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아내의 언어로

입력
2006.08.1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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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의 내 텔레재핑은 KBS1텔레비전의 '러브 인 아시아' 앞에서 처음 멈춘다. '러브 인 아시아'는 국제결혼한 부부들의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여기 출연하는 외국인 배우자는 아시아 지역에서 온 이들이다.

경제 형편이 우리보다 어려운 아시아 나라들 말이다. 더러 놓친 적도 있어서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아내 쪽이 외국인이고, 이들 외국인 아내는 남편보다 나이가 훨씬 적으며, 이들 가족이 사는 곳은 농촌이거나 소도시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급물살을 타고 있는 국제결혼의 표준적 양태를 반영한 것이겠다.

● '러브 인 아시아'의 부부들

'러브 인 아시아'에 등장하는 부부들은 금실좋은 부부들이다. 적어도 브라운관에 비친 모습은 그렇다.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지닌 여자와 남자가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테니,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국제결혼 부부도 많을 것이다. 그런 부부들을 왜 조명하지 않느냐고 '러브 인 아시아' 제작진을 탓할 수는 없다. '러브 인 아시아'는 '추적 60분'도 아니고, '취재파일 4321'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 외국인 여성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방송국 스튜디오에 앉아 있기는 해도, 보기에 어쩔 수 없이 안쓰럽다. 대개 시댁 살림 형편이 매우 어려운 터라, 이들은 육아와 가사 말고도 남편 못지않은 노동을 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몽골 출신 여성들을 제외하곤 외모에서 단박 외국인 티가 나니, 한국 사회의 무지막지한 인종주의에도 적잖게 시달릴 게다. 아이들이 꽤 자라면, 이 어머니들은 이제 그들을 돌볼 능력이 없다. 한국어가 아이들에게 달리기 때문이다. 아이들 학교 공부를 도와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이 여성들은 가족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고향의 가족을 보러 훌쩍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외국인 여성들은 한국에 온 이래 한 번도 고향엘 가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방송 출연을 계기로, 다시 말해 방송사의 지원으로, 처음 고향엘 다녀오게 된다.

'러브 인 아시아'를 보다 보면, 아내와 함께 출연한 한국인 남편에게 문득 화가 날 때가 있다. 딸뻘 되는 나이의 여성과 결혼했다 해서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살림이 아무리 어렵기로서니 아내에게 친정 나들이 한 번 못 시켜주나 하는 생각에 한국 남자로서 낯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그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길 수도 있다. 아내에게 육아와 가사노동에다가 경제활동의 짐까지 지우는 것 역시, 적잖은 한국 여성들 처지도 그렇지 뭐 하는 내 남성이기주의로 못 본 체할 수도 있다.

사실, 이들 한국인 남편들이 적령기를 훨씬 넘겨서야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게 된 데나 그 뒤에도 애옥살이에서 벗어나지 못 한 데는 당사자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도 있다.

그렇지만 아내가 그렇게 힘겹게 한국어를 익히는 걸 옆에서 보면서도 아내의 모국어를 조금이라도 배워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에는 화가 치민다.

이 남자들은 자기 아내가 줄곧 써왔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언어에, 자기 아이들의 엄마가 가장 편안해 하는 이방 언어에 손톱만큼의 호기심도 없는 것일까? 그런 호기심도 없는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 이런 둔감함은 사회 책임도 아니고, 외국어 약간 익히는 데 대단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바로 자기 아내가 '원어민 선생' 아닌가?

● 남편이여, 아내의 모국어 배워보자

내 아내가 외국인이 아니고 내 일상이 그 한국인 남편들만큼 바쁘진 않을지도 모르니,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하다. 그렇지만 서툴고 어색한 대로 베트남어 몇 마디를, 타갈로그어 몇 구절을, 몽골어 몇 문장을 자기 아내에게 매일 건네는 한국인 남편을 보고 싶다. 그리고 남편의 그 서툴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언어 속에서 행복해 하는 외국인 아내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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