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고이즈미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8ㆍ15 참배'를 기꺼이 실현하고 말았다.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야스쿠니 참배의 충동을 자극한 것일까. 참배 후 기자회견에서는 국내외의 압력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관철했다는 당당한 모습으로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이 답변했다.
고이즈미의 8ㆍ15참배와 기자회견을 보고 많은 일본인들이 대리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과 중국을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은 심한 모욕이며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무서운 도전이다. "부시가 말려도 갈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강조한 부분에서는 근린 아시아를 무시하는 친미종속적인 일본정치의 현주소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고이즈미의 8.15참배는 앞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정교분리 원칙을 둘러싼 위헌 소송이 예상되며, 헌법 개정을 둘러싼 정치적 논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한국, 중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더욱 꼬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보다도 포스트 고이즈미의 동향이다.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A급 전범'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 후 수상을 역임(1958~1960)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존경하고 있으며 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직은 고이즈미처럼 명확한 태도로 야스쿠니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A급 전범을 '전쟁범죄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점에서 보더라도 포스트 고이즈미의 정치자세와 역사관은 지금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동향에 대하여 우리의 야스쿠니 비판의 논리는 지나치게 빈약하다. 언제나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이며 여기에 붙는 상투적인 수식어는 A급 전범이다.
그러나 사실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는 14명의 A급 전범은 246만여 전체 합사자의 수에 비하면 거의 제로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식민지 출신자의 합사 문제가 알려지면서 시민단체 등과 연대하여 합사취하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지만 실천적인 문제에 치중하여 학문적인 연구나 역사적인 문제는 거의 경시되어 왔다.
야스쿠니 문제를 단순히 총리의 참배와 A급 전범에만 주목하여 비판하거나 또는 식민지 출신자의 합사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문제의 전체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예컨대 수상의 참배를 반대하고 그 중단을 요청해서 그것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가해자를 '영령'으로 미화하는 행위나 인식이 바뀌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1986년 나카소네 전 수상이 한국과 중국의 반발로 야스쿠니 참배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노마루(일장기)ㆍ기미가요(일본국가)'의 의무화 등을 통해서 국가주의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더구나 아베의 지금까지의 언행을 볼 때 과거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아베는 헌법 개정에 적극적이며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에도 앞장서는 강경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야스쿠니 문제를 하나의 독립된 성질의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본 우경화 전체의 동향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스쿠니 문제는 90년대 이래 분출된 역사교과서문제, 일본군위안부문제, 헌법개정문제 등과도 얽혀서 연동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더욱 더 폭넓은 시각으로 일본 우경화의 동향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박진우ㆍ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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