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역사에서 19세기 말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를 ‘벨 에포크’(Belle Epoqueㆍ아름다운 시절)라고 부른다. 풍요와 퇴폐, 쾌락과 죽음이 우아하게 쌍을 이루던 그 시절 문학과 예술의 최고 인기 품목 중 하나는 팜므 파탈(femme fatalㆍ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자)이다. 이건 남자들의 발명품이다. 19세기 중반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들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경계심이 팜므 파탈로 나타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롭스와 뭉크’ 판화전의 키워드는 팜므 파탈이다. 19세기 벨기에 판화가 겸 풍자화가 펠리시엥 롭스(1833~1898)와, 그보다 서른 살 아래로 20세기 초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노르웨이 작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판화 98점을 선보이고 있다.
두 작가 모두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인데도, 우리나라에 작품이 오기는 처음이다. 뭉크는 매우 유명한데도 그렇고, 롭스는 이름조차 낯설다. 롭스와 뭉크는 세기말 악마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에 이르는 미술사조의 흐름 속에 있다.
롭스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빌어 시대와 사회를 풍자했다. 여자, 어리석음, 그리고 죽음이 주도하는 세계를 표현했다. 치부를 드러내고 눈을 가린 채 돼지(성욕의 상징)의 인도를 받으며 위협적일 만큼 당당하게 걸어가는 창녀(‘창부정치가’)나 칼을 숨긴 채 높이 쳐든 손바닥에 남자를 올려놓고 조롱하는 여자(‘꼭두각시를 든 부인’)는 세계를 지배하는 팜므 파탈의 파괴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탄이 지배하는 악마적 세계,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유혹, 파멸을 부르는 어리석음을 팜므 파탈과 연결짓고 있다. “여성의 냉혹한 눈짓, 숨기지도 위장하지도 않고 온몸으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남성에 대한 적개심 등 롭스는 현대여성의 잔인한 측면을 묘사하는 데 정말 뛰어나다.”(롭스와 교유했던 프랑스인 공쿠르 형제의 평)
뭉크에게 여자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의 대표작 ‘마돈나’는 여인의 멍한 눈과 소용돌이치듯 불안하게 흘러내리는 선으로 쾌락의 절정, 곧 죽음을 암시하면서 웅크린 태아와 정충으로 테두리를 장식해 염세적인 공포를 배가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흡혈귀’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대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피를 빠는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피해망상에 가까운 이런 두려움은 병약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뭉크의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뭉크 자신은 20, 30대 청년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여성 해방의 한복판에서 무상한 시대를 살았다. 남성을 유혹하고, 사로잡고, 기만한 것은 여성이었다. 카르멘의 시대. 이 무상한 시대에 남성은 더 연약한 성(性)이 되었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의 잇따른 죽음과 아버지의 우울증 때문에 평생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쾌활하고 방자하게 사회 풍자 놀음을 즐긴 롭스와 달리 뭉크는 철저히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 인간 실존의 어둠과 고독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벨기에 트랜스페트롤 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브뤼셀-서울-오슬로 순회전이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02)2022-0600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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