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대표 브랜드가 된 김영하씨의 새 소설 ‘빛의 제국’(문학동네, 9,800원)이 나왔다. ‘검은 꽃’ 이후 3년 만에 나온 이 장편소설은 도회적 감수성과 경쾌한 문체라는 김영하의 스타일을 김영하 스스로가 배반하는 작품이다.
살결 위로 오돌토돌 올라온, 잘 발달된 힘줄처럼 이야기가 전면에 돋을새김된 이 소설은 저자명을 가리고 읽으면 김영하의 소설이라고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김영하스럽다’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전복한다.
소설은 남파된 지 20년이 넘은 잊혀진 스파이와 그의 가족들의 긴박한 24시간을 그린다. 평양외국어대 영어과에 재학 중이던 1980년 남파간첩으로 차출된 김성훈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구 695부대 130연락소)에서 4년간 대남공작원 교육을 받은 후, 김기영이라는 새 이름으로 남한에 침투한다.
학생운동세력 내부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당의 명령에 따라 입시를 치르고 연세대 수학과 86학번이 된 그는 노동당원이 주체사상을 학습해야하는 아이러니 속에 대학을 다니고, 졸업 후엔 영화수입업자가 돼 남파 간첩들의 포스트 역할을 한다. 하지만 1995년 자신을 내려보낸 북쪽 담당자가 숙청되면서 더 이상 ‘명령’은 내려오지 않고, 잊혀진 스파이는 ‘배는 불룩 나오고 가슴은 빈약하며 팔에는 물살이 출렁대는, 남한의 평균적인 중년남성’의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소설은 ‘하이네켄 맥주와 빔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고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 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이 자본주의의 소시민에게 돌연한 귀환명령이 떨어지는 어느 문제적 하루를 뒤쫓는다.
‘남쪽에 남을 것이냐, 북으로 돌아갈 것이냐’. 소설은 귀환까지 주어진 24시간 동안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며 선택의 미로를 헤매는 김기영과 그의 가족을 통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처럼 낮과 밤이 뒤바뀐 기괴한 세상 속의 비루한 인간운명을 탐색한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은 1960년 씌어진 최인훈의 ‘광장’에 대한 김영하의 문학적 응답이다. 처음부터 ‘새로 쓰는 광장’이라는 생각으로 집필에 들어갔다는 ‘빛의 제국’은 주체가 세계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최인훈의 ‘광장’이 갖는 문학적 한계를 미로 속을 헤매는 카프카적 인물을 통해 정면 돌파한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200쪽)
‘빛의 제국’은 쉽게 읽힌다. 작가의 내적 서술 대신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전통적인 서술법을 구사하는 탓이다. 주인공 김기영뿐 아니라 아내 장마리, 딸 현미 등 모든 등장인물에게 균등하게 초점화자의 신분을 배분하는 지독하리만큼 평등한 전지적 작가 시점과, 작가의 개성을 고의적으로 탈색한 평범한 서술 등은 마치 작가의 고전주의로의 복귀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검은 꽃’부터 서술자의 말이 아닌 형식과 구성으로 주제를 말하고 싶었다는 이 작가는 “뒤의 이야기가 앞의 이야기를 지워가며 인물들이 섬세하게 얽히는 치밀한 플롯이 ‘빛의 제국’의 의미 있는 새로움”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로서 모든 역량과 기예를 남김 없이 투여한 첫 작품”이라는 작가의 자부에 어떻게 독자들이 호응해줄지 지켜볼 일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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