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1월 28일 저녁 서울 장충체육관. 당대 최고의 인기스포츠 프로레슬링을 보려 모여든 관중이 8,000여석 실내를 입추의 여지없이 메웠다.
메인 이벤트는 한국챔피언 장영철과 일본 오쿠마와의 3전 2선승제 경기. 1대 1 상황에서 벌어진 세번째 경기에서 오쿠마가 장영철을 코너에 몰아붙여 허리꺾기를 시도하는 순간 장영철의 제자 레슬러들이 링 위로 뛰어올랐다.
이들이 맥주병 등으로 오쿠마의 얼굴을 난타하면서 장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튿날 조간신문들은 '난장판 국제프로레슬링' 등의 제목으로 이 사건을 일제히 사회면 톱에 올렸다.
▦파문은 다음날 더 커졌다. 장영철이 경찰에서 "프로레슬링은 사전에 승패를 정하는 쇼"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이날도 장영철이 2대 1로 승리하도록 돼 있었는데 오쿠마가 약속을 어기고 거칠게 몰아붙이자 제자들이 분노했다는 얘기였다.
당시는 마침 '역도산의 제자'임을 내세운 김일이 일본에서 귀국, 박치기로 인기를 끌면서 프로레슬링의 장영철 일인시대가 저물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사건으로 결국 링을 떠난 그는 이후 몇 차례 재기를 모색하기도 했지만 이미 프로레슬링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식어 버린 뒤였다.
▦장영철은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우리나라 초창기 스포츠영웅의 한 명이었다. 역도산 기록영화를 한 번 보고는 혼자 일본잡지 따위를 구해 연습하며 24세 때 프로레슬링이라는 새로운 경기를 처음 소개했고, 60년에는 일본레슬러들을 불러들인 첫 국제대회에서 시원한 경기를 펼쳐 프로레슬링을 일약 국민스포츠로 올려놓은 것도 그였다. 1
76㎝, 90㎏ 남짓의 크지 않은 체격이었지만 스피드와 순발력에 바탕한 드롭킥, 플라잉킥, 4자꺾기, 양발걸이 등의 현란한 테크닉으로 매 경기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근엄한 턱수염 인상과 깔끔한 경기매너에서 보듯 그는 신사였다. '쇼' 파동에 대해서도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당시 여러 경기규칙 등을 설명한 얘기에서 일부가 잘못 알려졌다"고 해명했다.
프로레슬링 경기에서는 치명상을 피하기 위한 암묵적 룰이 있는데 그 때 제자들이 흥분한 건 오쿠마에게서 룰을 저버린 위험한 '악의'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타계 또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의미를 갖는다. 삶이 고단했던 그 시절, 흑백TV 앞에 모여 앉아 그에게서 기쁨과 위안을 얻었던 모든 이들을 대신해 명복을 빈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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