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제 언어를 보통 (‘한국어’가 아니라) ‘국어’라 부른다. 영국인들이 제 일상어를 ‘영어’라 부르고 프랑스인들이 제 일상어를 ‘프랑스어’라 부르는 것과 견줘볼 만하다. 여기엔 납득할 만한 구석이 있다. 우리가 보통 영국이라 부르는 ‘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에서는 영어만 쓰이는 게 아니다. 공용어 영어말고도 지역 공용어로 웨일스어와 프랑스어가 인정되고 있고, 이 밖에도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지방별로 여섯 개 군소 언어가 영국 영토 안에서 지역어로 사용된다.
프랑스의 언어생태계는 종(種) 다양성이 훨씬 더 또렷하다. 공용어 프랑스어말고도 서른 가지가 넘는 언어가 그 나라 각지에서 쓰이고 있다. 10세기 말 이후 ‘국왕의 언어’가 되면서 그 나라의 제1언어로 권위를 세운 프랑스어는 대혁명 이후 뿌리내린 보통교육에 신세지면서 이젠 거의 모든 프랑스인의 언어가 되었지만, 아직 프랑스 전국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프랑스 영토 안의 이 군소 언어들은 프랑스어의 위세에 밀려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작은 언어들은, 비록 독립된 언어와 방언의 경계가 늘 또렷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어 방언이 아니라 프랑스어와는 다른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니, 영어나 프랑스어를 영국이나 프랑스의 ‘국어’라 명토박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사실 한 나라 영토 안에서 한 언어만 쓰이는 것은, 비록 한국인들이 거기 익숙해져 있긴 하지만, 매우 드문 현상이다.
반면에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는 오직 한국어만 사용된다. 그래서 이 언어를 ‘국어’라 부르는 것도 그럴 듯하다. 지난해 공포된 국어기본법은 제3조 1항에서 “‘국어’라 함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국어’라는 말이 한국 영토 안에선 오로지 한국어 한 가지만 사용된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다.
‘국어’라는 말은, 한국 영토 안에서는 한국어 한 가지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을 창조하는 노릇도 슬며시 겸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다시 말해 한국인이면) 누구나 ‘국어’를(다시 말해 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이 ‘국어’라는 말에 배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제는, 앞에서 살폈듯, 대부분의 나라들에선 결코 자명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 역사를 ‘국사’라 부르고 한국 문학을 ‘국문학’이라 부르는 관행과 마찬가지로, 한국 언어를 ‘국어’라 부르는 관행에는 자존(自尊)의 동역학이 작동하고 있다. 한국문화를 대상으로 삼는 학문을 뭉뚱그려 이르는 ‘국학’도 마찬가지다.
이 말들에서는 또 에도 시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의 시대) 이래 일본 국학(고쿠가쿠: 일본 고전 문헌의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선양하려던 17세기 이래의 학풍)의 메아리가 울린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 국학자들(고쿠가쿠샤)이 중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을 제 학문의 심리적 밑받침으로 삼았듯, 한국의 국학자들도 외국 문화에 맞버티는 자존에 기대어 제 학문을 다져 왔다.
그러니까 그들이 기댄 자존의 이념적 표현은, 저항적이든 패권적이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라 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조선어(학), 조선사(학), 조선문학이 해방 뒤 국어(학), 국사(학), 국문학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을 때, 그 개명(改名)의 본보기가 된 것은 일본인들의 관행이었을 게다.
‘국어’라는 말이 ‘국민’을 전제한다는 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국어’ 개념이 ‘국민’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말의 본적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려 더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고쿠고가쿠’(國語學)와 ‘고쿠고 교이쿠’(國語敎育)는 ‘일본인을 위한 것’이고 ‘일본어학’과 ‘일본어 교육’은 ‘외국인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재일 사회언어학자 이연숙에 따르면, ‘고쿠고/일본어’의 구별은 그런 ‘안/밖’의 구별에 대응하면서도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고쿠고(국어)는 ‘세계의 많은 언어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기를 거부하는 개념’(‘고쿠고와 언어적 공공성’, 2000)이다. 이연숙이 이 논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다 노부요시(志田延義)의 ‘대동아 언어 건설의 기본’(1943)에 따르면, “고쿠고는 국체를 수호하고, 국민을 양생 육성하며, 국체로 유지된다. 고쿠고는 ‘우리나라 말’이라는 뜻이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나열적인 뜻으로 일본어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고쿠고는 곧 일본 ‘국민’의 모어인 것이다.
이런 고쿠고론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에게 기묘한 열패감을 심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반도 주민들은 열도 주민들처럼 일본어를 ‘국어’라 불렀다. 그리고 제 일상어를 ‘조선어’라 불렀다.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국어’라 불렀다는 것은 반도 주민들이 ‘(일본) 국민’이었다는 뜻이다. 조선이 일본의 정식 영토였으므로, 조선인이 대외적으로 ‘일본 국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는 참정권이 없었고, 반도는 내무성이 아닌 총독부가 관할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대내적으로 여전히 ‘비일본인’, ‘비국민’이었다.
조선보다 앞서 점령된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내무성이 관할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과 대조적이다. 그것은 조선이 오키나와나 홋카이도와 달리 일본제국에 충분히 통합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반도에서 조선어의 지위를 ‘고쿠고’의 ‘방언’ 수준으로 끌어내려 궁극적으로 몰아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소위 ‘고쿠고 상용어화 운동’이나 ‘고쿠고 생활어화 운동’이 그 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일본어학자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는 조선어의 폐절, 다시 말해 ‘고쿠고 일원화’가 조선인의 복리(福利)라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국어를 ‘국어’라 부르는 관행에 일본어를 ‘고쿠고’라 부르는 관행만큼 국가주의 충동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한국어’의 쓰임새와 ‘고쿠고/일본어’의 쓰임새에선 나란한 편향이 읽힌다. 다시 말해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꼭 갈라놓아야 할까?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를 지금처럼 꼭 ‘국어’라 불러야 할까? 이 시리즈의 부제에서도 드러냈듯, 나는 ‘국어’보다는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딱히 국가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국문학’이나 ‘국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 한국어학자, 외국인 한국문학자, 외국인 한국사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어학자, 한국인 한국문학자, 한국인 한국사학자도 보고 싶다. 물론 여기서 ‘한국’은 딱히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약칭이라기보다 한반도라는 공간 또는 한반도 남반부라는 공간을 무심히, 다시 말해 별다른 정서적 이입 없이 가리키는 말이어야 할 테다.
▲ '조선어'와 '한국어'
정치적 이유로 갈린 호칭 통일되면 통일되지 않을까
‘국어’라는 유아적(唯我的) 이름을 버리기로 했을 때, 한반도와 해외 한인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한국어’라 불러야 하느냐 ‘조선어’라 불러야 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현실정치가 거기 깊이 끼여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선’이 일제 강점 이전 반도에 존재했던 전제 군주국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반도 북반부에 자리잡고 있는 전체주의 공화국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어라는 말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일제 시대엔 이 언어를 조선어라 불렀고, 해방 뒤에도 반도 북쪽에서는 여전히 조선어라 부르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도 오래도록 조선어라 불러왔다. 한반도에 두 국가가 수립된 뒤에도 일본에서 조선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일본인들이 북쪽에 우호적이어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말을 반도 전체의 지역 이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 두 나라 사이의 균형이 대한민국 쪽으로 크게 쏠린 데다가 한국 쪽의 집요한 로비가 먹혀 들어가, 이젠 일본에서도 한국어라는 말이 꽤 널리 쓰이고 있는 듯하다.
사실, 조선을 분단 이전의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면, 조선어라는 말이 한국어라는 말보다 객관적 서술에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남한 지역 주민집단의 심상 속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특정한 시기의 봉건 왕조나 지금의 북한 체제와 자주 겹치며 이물감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마냥 허투루 볼 수만도 없다. 그러니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이 언어를 남쪽에선 ‘한국어’로, 북쪽에선 ‘조선어’로 부를 수밖에 없겠다.
불행하게도 분단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언젠가 ‘한국어’와 ‘조선어’는 순수한 언어학 차원에서는 서로 방언관계에 있으되 정치적 이유로 서로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언어들에 합류하게 될지 모른다.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어 따위가 언어학적으로는 한 언어의 방언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듯 말이다. ‘한국어’와 ‘조선어’는 사실상 이미 그 단계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한자문화권 바깥에서 이 언어가 한 가지 이름(Korean, coreano, coreen 등)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주류 미국인들이 특별한 맥락 바깥에선 제 언어를 (‘미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부르듯, 한반도에서 쓰는 언어 이름이 어떤 ‘문화적 결단’에 의해 ‘한국어’ 또는 ‘조선어’로, 또는 제3의 이름으로(예컨대 남북 양各?공유했던 역사시대를 상기시키는 ‘고려어’나 국어운동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배달말’로) 통일될 수도 있겠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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