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발효 음식의 발견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발효 현상은 생식(生食)과 화식(火食)으로 이분(二分)되던 조리 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발효는 미생물이 자신의 효소로 유기물을 변화시켜 특유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발효 음식은 장기간의 저장이 용이하며, 그 속에는 영양소도 풍부하다. 그러나 숙성된 음식이 자아내는 최고의 풍미를 맛보기 위해 어느 정도 기다리는 인내심은 필수적이다. 만들자마자 즉시 맛을 볼 수 있는 발효 식품은 전혀 없다.
한 수필가는 이러한 음식의 숙성 과정을 인생의 완숙함에 빗대어 『피딴 문답』이라는 수필까지 쓴 적 있다. 썩기 직전에 최고의 맛을 내는 오리알 요리 ‘피딴’을 통해, 삶의 농익은 경지를 위해서는 오랜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전하는 글이다.
학생들은 지금 방학의 한 복판에 있다. 방학은 학기 중에 받아들인 내용들을 온전하게 숙성시키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수업을 통해 들어온 지식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이해와 반복이 필수적이다.
숙성된 이해과정은 심화된 지식의 천착을 가능하게 하며, 고도의 구조화를 거친 이 같은 지식은 강도 높은 내구성을 유지하며 학생의 탄탄한 학습적 저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평소 학생들의 학습 활동을 살펴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하루의 일과는 온통 학교 수업과 학원, 과외, 인터넷 강의로 꽉 채워져 있다. 끝도 없이 지식을 집어 삼키기에 바쁜 것이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지식의 홍수에 갈팡질팡 헤매던 학생들은 배운 내용이 농익기도 전에 시험을 치른다. 이번에는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온갖 임기응변식 방법들이 난무한다, 초치기 기술마저 동원된다.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도, 시험 시간까지만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시험 전에 날밤을 세워가며 공부했던 내용들이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감쪽같이 휘발되어 버리고 마는 기현상도 흔하게 발생한다.
응용문제만 보면 맥을 못 추겠다고 푸념하는 학생들이 있다. 내신 시험을 볼 때는 성적이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모의고사만 보면 점수가 곤두박질친다고 울상인 학생들도 있다. 하나하나는 알 것 같은데, 전체적 큰 그림이 안 보인다고 걱정하는 학생들의 푸념도 가끔씩 들려온다. 배운 내용이 완숙되지 못한 채 표피적 이해에 머물고 말 경우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방학은, 학기 중 숨 가쁘게 받아들인 지식의 정확한 위계화를 구축하며, 자신의 공부가 차분하게 농익을 수 있도록 학습을 위해 배려되어야 하는 시간이다.
학기 중 마구 쌓아 놓기만 했던 지식들은 학생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학생들은 방학의 시작과 동시에 또 다시 과한 사교육에 몸을 맡긴다.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방학 중의 공부는 고춧가루를 넣고 대충 버무린 겉절이 학습이 아니라, 발효과정을 거쳐 깊은 맛을 우러내는 묵은지 학습이 되어야 한다.
그날 그날 익힌 요령으로 승부하는 인스턴트 학습을 통해, 성숙된 실력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어설픈 최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습전문가ㆍ에듀플렉스대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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